다음 날 실험실에 돌아온 학생은 화들짝 놀랬다. 전날 사용하고 남은 폐용액이 플라스틱 용기에 구멍을 내고 바닥에 흘러버렸기 때문이다.
박수진 한국화학연구원 박사는 이러한 사례를 들면서 생활 속에 밀접한 화학적 원리를 이해하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사고를 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지난 17일 오후 대덕넷에서 ''생활속의 화학이야기''란 주제로 대덕지식나눔회 4번째 시간이 열렸다.
이번 지식나눔회의 강사로 초청된 박수진 박사는 평균 일주일에 화학 관련 논문을 1편씩 내놓는 등 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 화학계에서 왕성한 연구활동으로 인정받고 있는 대표적인 화학 박사.
1년 내내 도시락을 싸고 다닌다고 해서 연구원 내에서 ''도시락 박사''로도 유명하다.
늘 낙천적인 사고에 환한 미소를 띄고 있는 박 박사는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알게 모르게 화학을 만날 수 있다고 전했다.
박 박사는 "화학이란 학문에서 결합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며 "이 결합을 이용한 사례들을 생활속에서 많이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박사에 따르면 화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물질은 물과 기름 두 가지 성질로 나누어진다.
두 가지 물질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방법을 통해 생활 속의 많은 일이 일어난다.
물과 기름은 절대 섞어지 않고 같은 종류끼리는 완벽하게 융합되는 것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단순한 결합방법이다.
박 박사는 "물과 기름적 성질만 잘 파악해도 화학분야의 50%를 파악한다"며 물질의 화학적 결합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박 박사가 말하는 나머지 50%는 무엇일까?
박 박사는 "''물+물'', ''기름+기름''처럼 같은 성질의 물질끼리도 잘 섞이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며 오히려 ''물+기름''의 경우에 혼합이 이뤄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각각의 물질이 가진 산 성질과 알칼리 성질이 원인이다. 같은 물질끼리 잘 융합되는 기름, 물과는 달리 그 안에 있는 산과 알칼리 성질은 같은 성질끼리 절대 섞이지 않는다.
플라스틱은 원소재가 기름인 화합물이지만 보통 폐용액은 물성분이 많기 때문에 플라스틱 용기에 구멍이 나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박 박사가 설명한 화학전공 대학생의 사례는 물성분의 폐용액을 담아 둔 플라스틱 용기에 구멍이 생겼다. 이같은 현상을 박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플라스틱은 성분의 100%가 기름이 아니라 10~20%의 물을 가지고 있는 물질이다. 물적인 고분자는 주로 산성 성질인데 폐용액의 주 성분이 알칼리 성질이라면 구멍이 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화학 이야기가 우리 생활 주변에 활용되는 경우는 매우 다양하다.
결합의 원리를 이용해 발명된 제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자동차 타이어를 들 수 있다.
타이어는 개발된지 100년이 넘었지만 그 원리가 아직까지 그대로 사용될 정도로 완벽한 결합이 이루어진 제품이다.
타이어의 주성분은 고무와 카본블랙이 사용된다. 카본블랙은 고무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혼합하는 물질이다.
이 두 가지 성질이 잘 융합돼 튼튼한 제품으로 재탄생하게 된 이유는 고무와 카본블랙의 찰떡 궁합 덕분이다.
고무는 기본적으로 기름적 성질에 산성을 가지고 있으며 카본 블랙은 기름적 성질의 알칼리성으로 완벽한 결합요소를 지니고 있다.
박수진 박사는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타이어 공법에 변화를 주는 연구를 하고 있다. 기존의 타이어 품질을 그대로 유지시키며 색만 변형시킬 수 있는 ''컬러 타이어''를 연구중이다.
컬러타이어를 제작하기 위해선 카본블랙 대신 색을 칠할 수 있는 흰색 실리카를 이용해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실리카는 물성분의 약한 산성을 띄고 있어 고무와 결합이 어려운 단점을 가지고 있다.
박 박사는 이 두 성분의 융합을 위해 실리카 표면에 알칼리 성분을 코팅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현재 이러한 기술은 해외 타이어 업체 미쉐린이 성공한 경우가 있다.
생활 속의 화학 이야기는 그 외에도 다양하다.
보통 ''물비단''이라 불리는 인조비단의 예도 이러한 원리를 통해 탄생된 제품이다.
인조비단은 비닐에스테르라는 고분자를 화학용액을 이용해 섬유의 두께만큼 가늘게 만든 제품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원료의 무게와 두께를 80%까지 감소시키면 인조비단이 된다.
이 방법은 1960년 일본에서 나온 ''알칼리 공법''으로 기본적으로 산성질을 가지고 있는 비닐에스테르에 알칼리 성의 용액을 사용해 제조한다.
박수진 박사는 "이렇게 미리 기본 재료의 성질을 파악한다면 많은 시행착오 없이 결과를 이뤄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화장품의 경우도 자신이 피부의 상태를 미리 파악한 후 사용하는 화장품의 성질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원료의 성분이 기름인지 물인지, 또 그 것이 산성인지 알칼리인지 신중히 따져보면 자신의 피부에 가장 맞는 제품을 찾아 사용할 수 있다.
"국내 화장품 회사마다 사용되는 성질이 다르다. 정반대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신중히 확인해서 사용해 보는 것이 좋다"고 박 박사는 설명했다.
그 외에 이러한 결합 원리를 이용해 개발됐거나 개발 중인 기술은 유산규 음료의 캡슐이나 인조혈관, 탄소섬유, 약물전달기술, 디젤자동차 NOX 정화시스템, 방독면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박 박사는 "유럽에선 미생물부터 전기전자까지 화학으로 보고 있다"며 "국민소득 3만불 넘어가는 나라는 화학이 강하다. 기본소재가 강한 나라들이 힘을 발한다"고 말하며 국민들의 화학에 대한 관심을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