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가 26일 공개한 1983년 전후 외교문서를 보면, 당시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언론 노출 등 민주화 활동을 막아줄 것을 미국 정부에 요구했다.
"대한(對韓) 비판 성향의 보도 지속으로 우방 및 공산권 등에 대한 대한민국 이미지 저상","추종세력이 김대중이 건재한 것으로 인식했을 가능성", "대정부 비판활동의 활발한 전개", "향후 종교단체, 학원소요 등 문제성 집회시 보도내용 수시 거론 가능" 등이 이같은 활동의 이유였다.
실제로 1982년 12월 미국의 소리(VOA) 방송은 김 전 대통령의 워싱턴 도착 성명과 육성연설과 동정 등을 1982년 12월 25일~1983년 1월 16일 총 4차례에 걸쳐 보도했다.
이에 외무부 제1차관보는 1983년 1월 17일 주한미국대사관의 클리브랜드 공사를 만나 시정조치를 요청하고 다음날인 18일 외무부 미주국장 역시 블래익모어 참사관에게 비슷한 내용을 요청했다.
주미 한국대사도 김 전 대통령이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미 국무성 고위층과 접촉했다.
주미대사관 측은 이런 상황이 6개월 정도 지난 1983년 6월 8일 '김대중 동정과 대책' 이라는 문서를 만들어 외교부 장관에게 보냈다. 김 전 대통령의 미국 활동과 그에 대한 대책을 '집대성'한 문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나온 대책은 미 교민사회까지 포함하는 등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이었다. 당시 주미대사관은 김 전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는 계층을 과거 김대중 지원단체를 비롯해 각지의 호남교민 단체 일부, 일부 천주교 등 교회, 기타 반정부 불평분자, 한인 목사 등 미국인 등 7가지 계층으로 분류했다.
정부는 이들이 김 전 대통령을 구심점으로 한 민주화 세력이 될 것을 우려해 교민단체 지도층과 접촉하고 '건전한' 행사에 적극 참여할 것을 지원하도록 했다. 또 교포 언론 측과의 '긴밀하고 인간적인 접촉을 강화'하는 등 홍보활동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