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 씨는 "최종 벌금납부 기일을 앞두고 경찰들이 자꾸 집에 찾아왔다"며 "어린 자녀들과 조카들이 나를 범죄자로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노역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곽 씨는 하루 일당 5만 원씩 계산해 꼬박 80일을 교도소에 있다가 같은 해 6월에 노역기간이 만료됐다.
택시기사 유모(57) 씨 역시 2012년 말 음주운전을 하다 차량 3대를 파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벌금 7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유 씨는 면허가 취소돼 택시 운전을 할 수 없었고 설상가상 아내까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 노역을 자청한 유 씨는 하루 일당 5만 원으로 벌금 700만 원을 갚는 방식으로 꼬박 140일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유 씨는 "교도소 같은 방에 가짜 휘발유를 팔다 들어온 주유소 사장은 하루 노역 일당이 600만 원이었다"며 "그때 받은 상실감은 지금도 기억하기 싫다"고 울분을 토했다.
허 전 회장은 주말과 어린이날, 석가탄신일 등을 빼면 실제로 노역장에서 일하는 기간은 33일에 불과하다. 65세 이상 수형자에게는 과한 노역을 시킬 수 없다는 규정으로 허 전 회장은 기껏해야 주변 청소와 쇼핑백 접기, 봉투 만들기 등으로 254억 원을 갚게 됐다. 노역일수와 일수 정액(노역장 유치 하루에 해당하는 벌금액)을 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재판부의 재량에 달려 있어 가능했다.
호화 생활을 하던 허 전 회장이 귀국 후 벌금을 납부하는 대신 노역을 선택하면서 불법적으로 취득한 이익을 환수한다는 '벌금형 효과'는 사라졌다. 범죄 억지력이라는 '형벌 효과'도 날아갔다. 대신 일반인의 1만 배에 해당하는 초호화 몸값으로 생계형 범죄자들에게 엄청난 상실감만 남겼다.
곽 씨와 유 씨는 허 전 회장의 '일당 5억 원' 노역 논란에 대해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유 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벌금 700만 원을 내기 위해 다섯 달 가까이 노역했는데 대기업 회장은 하루에 5억 원이라니 말이 안 나온다"며 "몸에 금테를 두른 모양"이라고 비꼬았다. 곽 씨 역시 "있는 사람은 유리하고 없는 사람은 불리한 세상"이라면서 "하루 5만 원짜리 노역자들은 대부분 사회 밑바닥의 가장 힘없는 사람"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 가난을 엄벌하는 법치(法恥)
매년 벌금을 내지 못해 스스로 노역을 선택하는 생계형 범죄자가 4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벌금형은 징역형과 달리 비교적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교도소에 보내지 않고 금전을 뺏어 죗값을 치르게 하자는 취지의 형벌이다. 하지만 기초생활수급자와 노숙자, 차상위계층, 장애인, 투병자 등 가난한 사람들은 벌금을 낼 형편이 못돼 다시 노역장에 유치되는 아이러니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벌금 대신 노역을 선택하는 대부분의 수형자는 단순 절도와 폭행, 도로교통법 위반 등으로 많아야 수백만 원의 벌금을 내지 못한 사람들이다.
반면 허재호 전 회장 같은 일부 대기업 회장들은 하루 일당을 수억 원으로 계산해 천문학적인 벌금을 대신할 수 있다. 조세포탈 혐의로 벌금 2,340억 원을 선고받은 '선박왕' 권혁 시도상선 회장도 하루 일당을 3억 원으로 계산해 노역장 유치를 명령받았다. 역시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도 하루 일당은 각각 1억 1,000만 원과 1억 원으로 산정됐다.
'경제적 불평등'이 '형벌 불평등'으로 이어진 셈이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형벌을 살 수 있다'는 자조적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 "경제력에 맞게 차등벌금 부과해야"
전문가들은 경제력에 따라 형벌 체감이 달라지는 현행 제도를 하루빨리 뜯어고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먼저 벌금형 집행 방법을 다양화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개개인의 경제 사정에 따라 벌금 납부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를 분납하거나 일정 기간 뒤에 낼 수 있도록 유연성을 발휘하자는 게 핵심 주장이다. 현행 형법은 벌금이 확정되면 30일 안에 모든 금액을 완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벌금 분납이 '검찰징수사무규칙'에 명시돼 있지만, 신청이 까다롭고 잘 알려지지 않아 이용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또, 벌금 납부 의사는 있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는 경우에 노역장에 유치하지 말고 사회봉사명령을 부과해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동시에 벌금 납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의 활용도 논의되고 있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30일이라는 벌금 납부 기간은 지나치게 가혹한 데드라인"이라며 "생계형 범죄자들이 벌금을 내기 위해 보험 사기에 뛰어드는 등 2차 범죄 유혹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벌금을 대체할 사회봉사제도의 실태를 분석해 개선점을 찾아야 한다"며 "벌금 분납·연납 제도도 형법에 명시해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보다 근본적인 벌금형 개선방안으로 '일수(日數)벌금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일수벌금제란 벌금을 피고인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차등 부과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똑같은 형벌효과를 내자는 것이다. 몇 해 전 핀란드의 대표 기업 노키아 부사장이 과속운전으로 11만 6,000 유로(한화 약 1억 7,300만 원)의 벌금을 부과받은 게 대표적인 예다.
피고인의 재산상태 파악이 쉽지 않아 도입을 반대하는 분위기도 있지만 그동안 금융실명제나 부동산실명제, 국세청 과세 자료 축적 등으로 여건이 형성됐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한편, 대법원은 허 전 회장의 일당 5억 원짜리 노역으로 국민의 법 감정이 심상찮자 뒤늦게 개선안 마련에 나섰다. 대법원은 우선 오는 28일 열리는 전국 수석부장판사 회의에 벌금을 노역으로 대체하는 '환형유치' 제도를 안건으로 올리고 이를 논의하기로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수석부장 회의 논의 결과가 법원행정처장에게 보고되고 이를 토대로 환형유치 적정성 확보 방안이 마련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