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이직금지 기업담합은 범죄…한국과 반대

연구·개발·기술·창작 인력 6만4천명 보상 받을듯

애플, 구글, 인텔 등 미국의 실리콘밸리 지역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서로 인력 스카우트를 자제하자고 담합한 혐의로 집단소송에 걸려 기술 분야 인력 수만명에게 보상을 해야 할 위기에 몰렸다.

이는 '동종업체 취업금지' 등 조항을 별도 보상조차 없이 근로계약에 넣어 연구·개발·기술 인력의 이직을 막는 일이 허용되는 한국과는 정반대 상황이다.

24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북부 연방지방법원 새너제이지원에 따르면 이 법원의 루시 고 판사는 '하이 테크 피고용인 반독점 집단소송' 재판의 배심원 선정 절차를 5월 27일 개시키로 했다.

변론 종결은 7월 9일부터 시작될 예정이며, 그 며칠 후 배심원 평결이 나오게 된다.

피고는 어도비, 애플, 구글, 인텔, 인튜이트, 루카스필름, 픽사 등이며, 원고는 이 업체들에 2005년 초부터 2009년 말까지 근무했던 기술 분야 피고용인들이다.

고 판사는 이 소송이 집단소송으로 진행되게 해 달라는 원고 측 요청을 지난해 10월에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하드웨어 엔지니어, 부품 설계자, 애플리케이션 개발자, 제품 개발자, 유저 인터페이스 설계자, 품질 분석 담당자, 연구개발 담당자, 애니메이터, IT 전문가, 시스템 엔지니어, 그래픽 아티스트 등 기술·창작 분야 근로자 약 6만4천명이 소송에 참여해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될 전망이다.

법원은 최근 집단소송 진행 사실을 이들에게 서면으로 통지하고 재판 및 합의 일정을 알렸다.

집단소송이나 합의에 만족하지 않는 이들은 정해진 기한까지 절차를 밟아 별도 소송을 내서 더 큰 액수의 손해배상을 받으려고 시도하는 것도 가능하다.

피고 중 픽사와 루카스필름은 집단소송 합의금으로 900만 달러를, 인튜이트는 1천100만 달러를 각각 내놓겠다고 제안한 상태다.


이번 집단 민사소송은 지난 2010년 미국 법무부가 이 회사들을 상대로 낸 반독점법 위반 기소에 이어 나온 것이다.

당시 법무부의 기소 내용에 따르면 이 회사들은 서로 '콜드 콜'(cold call)을 하지 않기로 담합함으로써 반독점법을 위반했다.

'콜드 콜'이란 특정 근로자가 이직 의사를 밝히고 접촉해 오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편 회사가 먼저 이 근로자를 접촉해 스카우트를 제안하는 것을 뜻한다.

이후 이 회사들은 법무부와 합의하고 콜드 콜을 포함한 어떤 수단으로도 피고용인의 이직을 막으려고 시도하거나 기업간 인력 확보 경쟁을 제한하는 담합행위를 아예 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다만 당시 형사재판 합의에는 불법 담합행위 피해자인 근로자에 대한 보상 조항이 들어 있지 않았고, 민사 소송은 별도로 진행되고 있다.

구글 출신인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이번 재판의 증인 자격으로 재판부에 진술서를 제출했다.

페이스북이나 샌드버그는 이번 재판의 피고가 아니다.

진술서에는 샌드버그가 페이스북 COO로 취임한 직후인 2008년 8월 '페이스북이 구글로부터 인력을 대거 스카우트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이메일을 구글 고위 임원들로부터 받았으나 이런 요구를 거부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샌드버그는 "당시 나는 페이스북의 인력 채용이나 구글 임직원 고용을 제한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그 이후로도 페이스북과 구글 사이에 그런 합의를 승인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은 연구개발 인력의 이직을 인위적으로 제한하는 것 자체가 공정경쟁을 해치는 불법 행위라고 보는 미국 실리콘 밸리 지역의 분위기를 잘 보여 주는 사례다.

이는 우리나라의 주요 대기업들이 근로계약을 체결할 때 '경업금지 약정'이나 '동종업체 취업금지 서약' 등을 받는 방식으로 연구·개발 인력의 이직을 제한하고 '몸값'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관행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법원은 이번 사건을 '애플 대 삼성전자' 사건과 함께 주요 관심 사건으로 지정해 취재 편의 제공을 강화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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