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나이에 안 의사의 사촌 동생 홍근(洪根)씨의 3남 무생(武生)씨와 결혼했지만, 가정을 이룬 지 14년 만에 일제의 앞잡이에 의해 남편이 사망하면서 안 할머니의 삶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안 의사 가문의 며느리라는 자긍심으로 충만했던 안 할머니의 일제에 대한 적개심은 남편의 사망을 계기로 극에 달했다.
이때부터 바느질 삯으로 겨우 끼니를 연명하면서 안 의사의 공적을 세상에 알리는데만 매달렸다.
2천여명의 신자들이 모여 살던 당시 북만주 최대 한인 천주교 마을이었던 헤이룽장성 하이룬현 하이베이전 쉬안무촌에 살다가 하얼빈으로 이주한 그녀는 전쟁에 패한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안 의사 추모 사업'을 계속 이어갔다.
안 의사 후손임을 내세우기 위해 차(車)씨였던 원래의 성도 안(安)씨로 바꾼 그녀는 손수 태극기를 만들어 방안에 걸어 놓고 독립군을 상징하는 군복과 별을 수놓은 모자만 착용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고 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냉전체제에서도 안 할머니의 안 의사 공적 알리기는 계속됐지만 곧 중국 당국에 의해 '이적 행위'로 낙인 찍혔다.
1958년 하얼빈역 광장에서 태극기와 안 의사 초상화를 들고 안 의사 공적 인정과 종교 자유 등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다 공안 당국에 체포됐다.
당시 적대국이었던 대한민국의 국기를 흔들고 당국의 허가 없이 시위를 벌인 안 할머니의 행위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정치적 범죄 행위였기 때문이다.
반혁명죄로 무기형을 선고받아 옥살이하면서도 안 할머니는 치마 실오라기를 풀어 태극기를 만들어 감옥에 걸고 독립군복과 모자를 만들어 입고 쓰기를 고집했다.
개조 불능의 불순분자로 낙인 찍힌 그녀는 결국 1972년 오지인 네이멍구(內蒙古) 전라이 노동교화 감옥농장으로 이감돼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중국 내 개혁·개방 바람이 불고 한국과 수교가 이뤄지면서 1998년에야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꼬박 40년을 세상과 단절된 채 옥살이와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그녀는 풀려난 뒤 하얼빈의 성당을 전전하다 2000년 우연히 알게 된 최선옥(76·전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원장) 수녀를 만나면서 비로소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안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추모사업이 벌어졌던 2010년에는 국내 언론매체들이 앞다퉈 안 할머니의 기막힌 생애와 안타까운 근황을 전하면서 뜻있는 인사들이 하얼빈을 찾아 그녀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 할머니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채 1년을 가지 못했고 아시아나항공과 하얼빈 현지의 몇몇 한국기업, 국내 독지가들이 할머니의 생활비를 보태는 것 이외에 다른 방문객들의 발길은 뚝 끊겼다.
안 할머지는 노환으로 지난해 9월 이후 건강히 급격히 악화돼 올해 들어서는 거동은 물론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지난 1월 안 의사의 기념관이 하얼빈역에 문을 열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기만 했다.
평소 말수가 없는 할머니는 2010년 한국에서 찾아온 손님들과 휠체어를 타고 마지막으로 안 의사 의거 현장인 하얼빈역 1번 플랫폼에 갔을 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 동행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안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돌봐온 최 수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처를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온 할머니를 더 잘 보살펴 드렸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남는다"면서 "할머니와 멀리서 할머니를 후원하며 정성을 보태주신 모든 분들을 위해 평생 기도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