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우드 펀딩' 영화…시민사회 '십시일반의 힘'

공동체 역량·동시대성 가치 담은 창작물 제작 대안으로 떠올라

크라우드 펀딩으로 만들어진 영화들. 왼쪽부터 '26년' '천안함 프로젝트' '또 하나의 약속'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이 시민 사회의 자율 공동체 역량과 동시대성의 가치를 담은 창조적인 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데 특화된 대안 제작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

소셜 펀딩(Social Funding)이라고도 불리는 크라우드 펀딩은 온라인으로 연결된 SNS 등을 통해 소규모 후원·투자를 목적으로 개인들로부터 돈을 모으는 방식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몇 년 새 영화 콘텐츠를 중심으로 크라우드 펀딩의 영향력이 커지는 추세인데, 2012년 개봉한 '26년', 올해 관객들과 만난 '또 하나의 약속'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러한 흐름을 만든 데는 거대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국내 영화 제작의 현실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영화, 공연 등 문화 콘텐츠와 관련한 크라우드 펀딩을 운영하는 펀딩21의 전상준 부장은 "상업 영화 제작사들은 시나리오 개발부터 감독·배우 섭외까지 제작의 모든 과정을 담당하면서도 그 영화를 찍을 돈을 구하고자 투자처를 찾아다녀야 한다"며 "소위 4대 배급사로 꼽히는 CJ, 롯데, 쇼박스, NEW로부터 투자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영화의 제작 여부를 가름하다보니, 그들의 기호에 맞춰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전했다.

결국 자본에 휘둘리는 제작 방식이 관행처럼 굳어진 탓에 흥행 공식에 기댄 획일화되고 민감한 사회 문제를 외면하는 영화들이 양산되는 상황에서, 크라우드 펀딩이 새로운 제작 방식에 대한 영화인들과 관객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펀딩21의 김정선 팀장은 "2003년 제작된 '바람난 가족'은 네티즌펀드를 통해 제작비를 댄 성공적인 케이스로 남아 있고, 26년 역시 정치적 이유로 두 번이나 제작이 무산됐다가 관객의 힘으로 7억 5000만 원을 모아 제작비 일부를 충당할 수 있었다"며 "이러한 사례들이 영화인들에게 놀라운 자극을 줬고, 대기업 중심으로 영화가 제작되는 구조에서 개인의 참여 폭이 넓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낳을 수 있다는 믿음을 쌓아 왔다"고 말했다.
 
■ '중계자' 아닌 '동반자'…크라우드 펀딩의 길

위안부 문제를 청년 세대에 알리는 데 일조한 영화 '그리고 싶은 것'
국내 크라우드 펀딩은 온라인과 모바일 위주로 운영되는데, 제작사가 요청한 영화에 대해 사이트 운영사가 승인을 하면 회원들이 그 영화를 후원할 수 있는 구조다.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국내 대표 크라우드 펀딩 업체가 텀블벅, 굿펀딩, 유캔펀딩, 그리고 펀딩21이다.

지난해 6월 영화매체 씨네21 산하에 만들어진 펀딩21의 경우 위안부 문제를 다룬 '그리고 싶은 것'(2012), 천안함 사건에 대한 합리적 의혹을 제기한 '천안함 프로젝트'(2013), 올해 개봉을 앞둔 대형마트 계약직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카트' 등 지금까지 21편의 영화에 대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다. 작게는 500만 원에서 많게는 1억 원 가까운 규모로 편당 제작비를 지원했는데, 회원들의 평균 후원금액은 2만 원가량이었다.
 
김 팀장은 "우리 모토가 작은 것에서 큰 울림을 만드는 나비효과인데, 그리고 싶은 것의 경우 20대 초반 청년들이 십시일반 모아 2000만 원 넘게 후원했고,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함으로써 비슷한 작품들이 나오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다"며 "크라우드 펀딩은 보통 목표금액을 달성하지 못하면 무산되는 방식과 달성하지 못해도 모아진 금액을 후원하는 것으로 나뉘는데, 우리는 국내 영화 제작 현실상 적은 금액도 도움이 되는 구조인데다 영화의 제작 필요성에 공감한 후원자들을 염두에 둬 후자를 택하고 있다"고 했다.
 
영화 콘텐츠 관련 크라우드 펀딩 운영의 관건은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후원금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극장에 걸림으로써, 실제로 관객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이점에서 운영 업체들이 단순히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하는 중계자 역할에 머물지 않고, 동반자로서 책임을 지려는 모습이 요구된다.
 
전 부장은 "안타까운 점은 문화 콘텐츠를 물품 구매나 시사회 판매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는 것인데, 크라우드 펀딩에 대한 제대로 된 룰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이트에 소개만 하고 우왕좌왕하는 케이스가 다반사"라며 "우리의 경우 심사를 통해 이 부분을 충족시키려 애쓰고 있는데, 관객과 실제로 만날 수 있는 건강한 작품들을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1인 창작자 영화도 극장에 걸 수 있다는 혁명"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돼 올해 개봉을 앞둔, 대형마트 계약직 노동자들의 애환을 다룬 영화 '카트'의 한 장면.
국내 크라우드 펀딩의 활성화를 돕자는 차원에서 법제화에 대한 논의도 이뤄지고 있지만 '금융권 테두리로 묶냐' '중소기업 지원책에 포함시키냐'를 두고 부처간 입장차가 커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 부장은 "크라우드 펀딩의 법제화는 현재 후원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에서 수익률을 보장하는 투자 개념으로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적인데, 금융 투자로 볼 것이냐, 중소기업 지원으로 볼 것이냐에 대한 법안이 각각 다른 의원에 의해 발의돼 모두 국회 계류 상태로 있다"며 "최근 국회에서 열린 관련 세미나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금융권에 포함될 경우 펀드 설계자가 금융자격증을 갖고 있어야 하는 등 규제가 심해진다는 점에서, 그나마 창의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유연한 중소기업청에 포함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고 했다.
 
문화 콘텐츠와 관련한 크라우드 펀딩은 이제 시민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단계다.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대기업 투자자를 찾아다니지 않고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인식이 커졌고, 시민들도 자신이 자금을 지원한 영화가 극장에 걸린다는 뿌듯함을 실감하고 있는 모습이다.

기존 메이저 제작 시스템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1인 창작자의 영화가 극장에 걸리는 혁명적 변화까지 가져올 수 있다는 데 크라우드 펀딩의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
 
김 팀장은 "연간 4.5편의 영화를 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영화라는 매체는 생활에 가장 깊숙이 들어와 있는 함께 움직이기 좋은 무엇이고, 크라우드 펀딩은 뜻 있는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자금으로 꿈을 현실로 만드는 새로운 방식의 기술"이라며 "한국 영화가 커 온 힘이 창조적인 콘텐츠에 있다는 점에서 그 창조성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크라우드 펀딩의 운영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