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는 석연찮은 판정 속에 올림픽 2연패가 무산된 김연아(24)와 관련해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확인되지 않은 김연아의 결과 승복 멘트를 기사에 실었다가 빼는 해프닝, 금메달리스트인 러시아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의 세계선수권대회 불참 등 이슈가 이어졌습니다.
쇼트트랙 역시 식지 않은 감자로 남아 있습니다.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빅토르 안)의 대활약과 남자 대표팀의 노 메달로 촉발된 대한빙상경기연맹에 대한 비난 여론은 올림픽이 끝나면서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연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안현수의 아버지와 전 국가대표 감독 등 쇼트트랙 관계자들이 연맹에 대한 쓴소리를 여전히 쏟아내고 있는 상황. 연맹의 부조리 여부를 철저히 조사하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결과물도 나와야 합니다.
이에 시간이 다소 흘렀지만 쇼트트랙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다뤄 보려고 합니다. 올림픽은 끝났어도 한국 쇼트트랙은 계속 돼야 하기에, 또 한번쯤은 쇼트트랙이라는 종목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고찰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다시 쓰는 기사입니다. 마침 이번 주말 세계선수권대회도 열려 선수들이 안현수와 얄궂지만 선의의 재대결을 해야 하기도 합니다.
피겨 판정처럼 '소치 레터'로 기획했으나 워낙 복잡한 사안의 민감성과 빠듯한 일정으로 마무리하지 못했던 주제. 올림픽 폐막 3주 차라는 시간적 괴리감으로 제목은 '스포츠레터'로, 그러나 올림픽 기간 시작했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소치 레터 후기③' 부제를 달고 기사 작성에 나서 봅니다.
▲'선과 악' 극명하게 나뉜 韓 쇼트트랙
여기에는 안현수의 아버지 안기원 씨가 올림픽 즈음해서 수차례에 걸쳐 했던 인터뷰 내용이 불을 지폈습니다. 안현수가 한국에서 파벌 싸움의 희생양이 돼 러시아로 귀화할 수밖에 없었고, 연맹은 한 고위 임원이 전횡을 휘두르는 부조리한 집단이라는 게 주요 내용입니다.
더욱이 안현수가 8년 만에 올림픽 3관왕을 차지하는 맹활약을 펼치고 우리 남자 대표팀이 부진하면서 연맹에 대한 공분은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안현수의 귀화 과정에 문제는 없었는지를 조사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도 있었습니다.
국민 감정의 정점은 안현수가 1000m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 장면이었습니다. 이날은 여자 1500m에서 가장 확실한 금메달 후보였던 심석희(17, 세화여고)가 은메달에 머문 데다 남자 에이스 신다운(21, 서울시청)도 안현수와 경쟁한 결승에서 실격된 상황. 한국과 러시아 쇼트트랙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연맹에 대한 비난 여론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이후 김연아가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에 금메달을 내준 피겨 여자 싱글 판정으로 한국 내 '반(反) 러시아' 감정이 확산되면서 쇼트트랙에 대한 관심이 다소 흩어졌습니다. 안현수 역시 3관왕을 이룬 뒤 기자회견에서 "귀화 이유는 파벌 싸움 때문이 아니고 마음 편하게 운동할 수 있는 환경 때문이었다"고 밝히면서 연맹에 대한 비난도 어느 정도 수그러든 양상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연맹은 공격의 대상입니다. 피겨나 쇼트트랙 관련 기사에는 아직도 연맹을 조소하고 풍자하는 댓글이 올라옵니다. 안기원 씨는 올림픽 이후 "응어리가 풀렸다"면서도 '용서'라는 표현으로 연맹의 잘못이 있었음을 시사했고, 이준호 전 여자 대표팀 감독 등은 연맹에 소통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꼬집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물론 쇼트트랙 대표팀 운영은 특정 인사의 주도로 이뤄져 왔습니다. 여기에는 동계올림픽 효자 종목으로 인식될 만큼 화려했던 성과에 묻힌 운영의 독단도 분명 있을 겁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듯 빛나는 성과 뒤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모든 부분을 잠시 놓아두고 쇼트트랙이라는 종목이 갖는 근원적 딜레마에 대해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이전에도 수차례 거론된 부분이지만 아직까지도 일반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다시금 꺼내드는 얘기입니다.
소치올림픽 남자 1000m 경기 후 은메달을 따낸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그리고레프는 "내 역할은 안현수가 1위를 하도록 다른 선수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것이었다"면서 "안현수와 내가 빠르게 앞서면서 다른 선수들의 추월은 불가능했다"고 밝혔습니다. 러시아로서는 훌륭한 작전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 1000m에서 박승희(22, 화성시청)와 심석희는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금, 동메달을 따냈습니다. 박승희의 금메달에는 심석희가 다른 선수들을 알게 모르게 막아주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옵니다. 작전의 승리였던 겁니다. 다른 국가들 역시 같은 상황이라면 마찬가지 방법을 썼을 겁니다. (아마 가장 적나라한 게 중국이겠죠?)
하지만 이 작전을 국내 대표 선발전에 대입시킨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건 밴쿠버올림픽 이후 한국 쇼트트랙계를 뒤흔든 이른바 '짬짜미'가 될 겁니다. 같은 소속이거나 친분이 있는 선수들끼리 합심해서 다른 선수들을 막아내 원하는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겁니다.
국제대회에서는 뻔히 통용되는 보이지 않는 룰이 국내 대회에서는 승부 조작으로 둔갑하는 종목. 그것이 쇼트트랙인 것입니다. 방법은 같지만 대회에 따라 정당성과 부당성이 갈리는 모습은 마치 로맨스와 불륜의 경계를 보는 듯합니다.
▲새로운 로맨스를 찾아 떠난 선수들
이런 관점에서 '안현수 사태'는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일지 모릅니다. 그동안 안현수는 한국에서 부상과 세월 속에 비주류로 밀려 똘똘 뭉친 주류에 편입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때 안현수도 로맨스의 영역에서 달콤함을 즐겼던 선수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올림픽에 16살의 나이에 국가대표 경쟁 없이 선발된 안현수는 이후 2006 토리노올림픽에서 3관왕에 오르는 등 쇼트트랙 황제로 군림했습니다. 이후 오랜 부상으로 신음하는 등 태극마크를 달지 못하자 아버지가 대신 나서서 '그들의 로맨스'를 불륜이라고 맹비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1000m 은메달과 5000계주 금메달을 따낸 러시아 그리고레프 역시 귀화 선수입니다. 지난 솔트레이크시티와 토리노올림픽에는 우크라이나 국적으로 뛰었지만 이후 러시아로 귀화해 안현수와 함께 출전했습니다. 그리고 개인 통산 첫 메달을 따내면서 새 조국인 러시아에도 메달을 안겼습니다.
1000m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한 외신 기자는 그리고레프에게 "당신이 옛 조국에서 받은 대우를 알고 있다"면서 심경을 물었습니다. 일단 그리고레프는 즉답을 피했고 "지금 안현수와 같이 좋은 선수와 경기를 해서 좋다"고 에둘러 말했습니다. 대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그리고레프의 귀화 이유는 "우크라이나에서 얼음판이 자유로웠던 곳은 오직 키예프뿐이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유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더 좋은 환경을 위해 러시아로 온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솔트레이크시티 여자 계주 금메달리스트 최민경도 이후 대표 선발전에서 밀린 뒤 프랑스의 제의를 받고 귀화했던 사례가 있습니다. 비단 안현수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쇼트트랙 딜레마' 연맹도 치열한 주도권 레이스
요지는 무조건 선과 악을 단칼에 나눠 마녀 사냥 식으로 사태를 몰아가기에 앞서, 쇼트트랙 종목의 본질을 조금만 더 깊이 이해한 뒤 비판의 칼을 들어도 늦지 않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다는 겁니다.
만약 A선수가 B, C 등 다른 선수가 비켜주지 않아 순위가 밀렸다며 불만을 제기한다면, B, C는 대답할 겁니다. "그럼 내가 밀리는데?" 쇼트트랙은 원래 그런 종목인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현재 연맹과 관련한 잡음도 쇼트트랙 경기와 비슷하다는 양상이라는 겁니다. 한 쇼트트랙 관계자는 "현재 연맹에 집중되는 쓴소리는 장명희 아시아빙상연맹 회장 등 현 집행부에서 소외된 세력들의 주도하고 있다"면서 "수십 년 동안 회장과 임원 등 연맹에 관여해오다 지난해야 물러난 장 회장이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도 우습지만 다시 기득권을 찾으려고 하는 점도 문제"라고 꼬집었습니다.
즉 내가 해왔던 로맨스를 남이 하니 불륜이라고 성토하는 모양새라는 겁니다. 다만 선수들처럼 새로운 조국을 찾아 떠나지는 못하니 종목을 나눠 연맹을 분리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연맹의 헤게모니를 두고 다투는 모습이 치열한 레이스를 보는 듯도 합니다.
p.s-존경해 마지 않는 모 선배 기자는 올림픽 기간 "아예 쇼트트랙을 올림픽에서 빼거나 획기적인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공공연한 승부 조작이 용인되는 종목인 만큼 폐지하거나 조작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2명이 달리거나 순차적으로 출발해 짬짜미나 고의 충돌 여지를 주지 않자는 겁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의견이나 여전히 고민이 남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대회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여자 계주 심석희의 전율 스퍼트는 이제 나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폭발적인 질주로 상대를 제칠 때의 짜릿함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쇼트트랙의 매력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쇼트트랙을. 정말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쇼트트랙은 원래 그런 종목이니 이대로 그냥 지켜봐야만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