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라는 '뜨거운 감자'를 두고서다. 한국과 일본의 정상이 서로 악수하기를 희망하는 미국, 일본의 진정한 태도변화 없이는 정상회담이 무의미하다는 한국, 미국과의 정상회담에 기대어 상황을 적당히 모면해보려는 일본의 엇갈리는 속내가 교차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통상 다자 정상외교의 꽃으로 불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서 3국 사이에 어떤 조합과 모양새의 접촉이 이뤄질지가 워싱턴 외교가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한·일 정상간 '화해'를 독려하는 미국의 움직임은 갈수록 노골화되고 있다.
4월 하순 한국과 일본을 모두 방문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양국관계 개선 만큼 '명분'과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외교적 성과가 있을 수 없다. 역내 안정과 평화에 기여하는 동맹의 축을 복원하면서 대(對) 중국 견제의 안보적 틀을 공고화하는 의미가 있다. 미국으로서는 자연스럽게 두 정상이 관계개선에 나서도록 압박의 강도와 수위를 직·간접적으로 높여가고 있다는 관측이다.
오바마 1기 행정부때 외교·안보정책을 총괄해온 톰 도닐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지난주 한 세미나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핵안보정상회의에서 만나길 기대한다"고 말한 것은 백악관의 기류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핵안보정상회의를 계기로 관계개선의 징후가 서서히 나타나길 희망하고 있다는게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미국의 압박에 '쫓기는' 쪽은 일본이다. 4월 하순 3년6개월만의 국빈방문 의미를 살리려면 미국이 희망하는 사항들을 들어줘야 하고 그러려면 '과거사' 문제에서부터 전향적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게 워싱턴의 대체적 기류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베 정권이 갈수록 '좌충우돌'식 행보를 이어가는데 대해 미국 정부는 직·간접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캐롤라인 케네디 주일 미 대사는 지난 6일 일본 NHK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지역 정세를 좀 더 어렵게 만드는 일본의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미국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미국 정부는 또 군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河野)담화를 수정하려는 아베 정권의 검증 행보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강한 우려의 뜻을 전달했다고 일본 TBS가 10일 보도했다.
일본은 외견상으로는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서는 듯한 '모양새 갖추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사이키 아키타카(齋木昭隆)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12일부터 이틀간 한국을 방문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기대는 별로 높지 않은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핵안보정상회의 공간에서 오바마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과 얼굴을 맞닥뜨려야 하는 아베 총리로서는 답답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지난달 언론을 통해 핵안보정상회의에서의 한·일 정상회담 의사를 간접 타진했다가 결국 '퇴짜'를 받았다. 그러자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이를 새삼 부각시키며 상황을 적당히 넘어가보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날 일본 언론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핵안보정상회의에서 양자 정상회담을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것은 이런 맥락으로 보인다.
사실 50여명의 정상급 인사들이 참석하는 핵안보정상회의에서 회의기간 무려 200여차례의 양자회담이 열린다. 정상간의 만남 자체가 외교적으로 중요하기는 하지만 '약식' 회담이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는게 외교가의 시각이다. 더욱이 40일 뒤면 오바마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 방문한다.
일본으로서는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과거사 논란에 고정된 국제사회의 시선을 돌리면서 우크라이나 사태 등 국제현안을 미국과 논의하는 모습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중국을 심리적으로 견제하려는 노림수가 있어보인다는 분석이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인다. 역시 미국의 '주문'을 의식하고 있지만 일본이 역사문제에 있어서 진정한 태도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정상회담이 의미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왔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일 3·1절 기념사에서 "과거의 잘못을 돌아보지 못하면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없고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강조했다. 일본으로부터 확실한 '조치'를 이끌어내겠다는 뜻이 읽힌다.
한·미 정상의 회동은 핵안보정상회의의 분위기와 상황을 봐가며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한 외교소식통은 "정상간 회동은 미정인 상태"라며 "40여일 뒤 한국에서 정상회담이 예정돼있기 때문에 반드시 정상간 회동이 필요하다는 입장은 아니며 상황에 따라 결정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회의기간 한·미 또는 미·일 정상간 회동이 있을 수 있지만 한·일 정상간 양자회동은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다만 핵안보와 안전을 주제로 하는 회의라는 점에서 상황에 따라 한·미·일 3국 정상회동이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시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