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의 한국 방문 이후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경색된 한일 관계에 모종의 변화된 흐름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이 제기됐다.
케리 장관이 서울에서 열린 지난달 13일 한미외교장관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한일이 역사를 극복하고 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이 좋다"면서 "두 동맹국이 과거 문제는 제쳐놓고 협력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찾도록 돕겠다"고 밝힌데서 보듯 미국은 핵심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이 현재와 같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는데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중재할 만큼 이 사안이 그렇게 두드러져서는 안 된다"며"고 사실상 오바마 대통령의 4월 한일 양국 방문 이전이라는 '시한'까지 제시했다.
실제로 케리 장관의 발언 직후인 지난달 18∼19일 이하라 준이치(伊原純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방한해 이상덕 외교부 동북아국장과 회동했다.
한일관계를 주무로 하는 두 당국자가 만나는 것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작년 말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이후 처음이었다.
이어 사이키 아키타카(齋木昭隆)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오는 12∼13일 방한해 조태용 신임 외교부 1차관과 만난다. 상견례 형식을 가미한 만남이라고 하지만 국장급에 이어 협의 채널이 격상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사이에 미국은 지속적으로 한일 관계의 개선을 독려했다.
마리 하프 국무부 부대변인은 지난달 19일 정례브리핑에서 "우리는 한국과 일본이 견해차를 해소하기 위해 대화를 통해 함께 노력하길 바란다"며 "동맹인 양국이 공조할 것을 지속적으로 독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아시아 외교정책을 실무적으로 조율하는 대니얼 러셀 차관보는 더욱 체감있게 미국의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지난 4일 상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가 개최한 '동북아에서의 미국 동맹 강화 방안' 청문회에 출석해 "미국의 두 동맹(한·일) 간의 관계가 긴장되는 것은 정말 우려스러운 부분"이라고 말한 뒤 "어려운 역사 이슈를 다루는 데 있어 신중함과 자제를 보여줘야 할 시급한 필요성이 있다. 양국의 역사 문제는 갈등을 치유하고 관계를 개선하는 방법으로 다루는 게 중요하다"고 촉구했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사이키 차관이 아베 총리의 측근이라는 점에서 이번 차관급 협의의 결과를 주시하고 있다. 특히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선제적이고 진정성있는' 과거사 관련 조치가 도출될 지가 관심사다.
아울러 점차 격상되는 한일 양국의 협의 채널이 어디까지 확장돼갈지도 주목한다. 외교장관 회담을 넘어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간 정상회담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말한다.
물론 미국의 주요 당국자들은 신중한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주시하자'는 미국의 주문을 한일 양국이 잘 이해하고 있지만 쉽게 극복하기 힘든 갈등의 뇌관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과 같은 도발을 이어온 일본이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구체적이고 진정성있는 조치를 먼저 해야 한다는 한국 정부의 입장은 크게 변함이 없는 상황이다.
윤병세 외교장관은 지난 5일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한국 외교장관으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명시적으로 제기하면서 일본의 태도변화를 강하게 촉구했다.
그는 특히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고노(河野)담화에 대한 수정 움직임을 보이는데 대해 "유엔 인권 메커니즘이 일본 정부에 대해 수차 요청한 것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거나 "반인도·인륜적 처사" 등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일본의 아베 정권의 행보에 대해 한국 정부가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 따라 차관급 협의에서도 뚜렷한 진전을 도출하지 못할 가능성도 미국 측은 상정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에 불만이 많은 만큼 일본에서도 한국의 '완고한 태도'에 지쳤다는 불만이 점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다만 4월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이전에 한일 양국이 가급적 서로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도모할 공간을 만드는데 주력해주기를 바라는 기색이다.
현지 외교소식통은 "미국은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북한 핵문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핵심 동맹인 한일 양국관계의 개선이 시급한 외교과제"라면서 "미국의 '중재노력'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