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남부 크림반도로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킨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내 군사력 사용에 관한 상원 승인까지 받으면서 크림에서의 군사충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실각하고 친서방 성향의 기존 야권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도 한동안 의외의 침묵을 지키던 푸틴 대통령이 드디어 러시아의 영향권 이탈을 꿈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응징에 나선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전격적으로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서부 군관구와 중부군관구에 비상 군사훈련을 명령했다.
이에따라 15만명 이상의 병력과 90대의 전투기, 870대의 탱크, 80척의 군함 등이 기동 훈련에 돌입했다.
이 훈련의 일환으로 수천명의 병력이 벌써 러시아 흑해함대가 주둔 중인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로 이동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있다.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은 1일 러시아가 6천명의 병력을 크림으로 이동시켰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과도정부의 크림반도 파견관 세르게이 쿠니친은 그 전날 각각 150명의 병력을 태운 13대의 러시아 수송기가 크림반도 심페로폴 인근 공항에 착륙했다고 전했다.
러시아가 아직 공식 확인하고 있진 않지만 상당 규모의 병력이 크림으로 이동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는 크림반도 흑해함대 기지로의 병력 이동이 양국 간 협정에 따른 것으로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우크라 과도정부는 사실상의 '군사침공'이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개입을 좌시하지 않겠다며 강력히 경고하고 나섰다.
하지만 러시아에선 푸틴 대통령이 실제 군사공격 카드를 실제로 사용할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견해가 더 많다.
국제문제 유력 전문가인 모스크바의 '국제경제와 국제관계연구소'(IMEMO) 부소장 바실리 미헤예프는 "러시아가 지금까지 취한 행보는 '겁주기'의 일환이며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익명을 요구한 모스크바의 다른 국제문제 전문가들도 대부분 "러시아가 새로 들어선 친서방 성향의 우크라이나 중앙정부를 압박하는 차원에서 단계적으로 긴장의 수위를 높여가고는 있지만 실제로 군사 개입에 나설 가능성은 아직은 크지 않다"고 전망했다.
러시아는 우선 외교적으로 새로 권력을 잡은 우크라이나의 기존 야권 세력이 지난달 21일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서명했던 정국위기 타개 협정을 파기한 것을 문제삼으며 과도 정부의 합법성을 공격하고 있다.
경제적으론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이 나서 지난해 말 푸틴 대통령이 야누코비치 대통령에게 약속했던 가스공급가 할인(1천㎥당 400달러에서 268달러로 인하) 혜택을 취소하겠다고 경고했다.
또 일부 우크라이나산 식료품 수입을 중단할 수 있다는 위협도 했다.
이어 비상 군사훈련과 크림반도로의 병력 이동 등을 통해 군사개입 가능성을 내비침으로써 우크라이나 새 정부에 대한 압박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러시아가 실제 군사행동에 나서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
우선 그동안 리비아, 시리아 사태 등에서 외국 개입, 특히 군사개입에 강하게 반대해온 러시아가 스스로의 원칙을 깨고 무력개입 카드를 꺼내드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11월 말부터 계속돼온 우크라이나 정국 위기 와중에도 서방의 중재 시도를 외부 개입이라며 강하게 비난하면서 우크라이나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런 러시아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우크라이나 사태에 군사개입할 경우 미국과 유럽연합(EU) 등과의 첨예한 갈등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다.
거액을 쏟아부은 소치 올림픽 이후 국가 이미지 개선 효과를 이용해 서방의 투자를 끌어들임으로써 정체상태에 빠진 경제를 활성화해보려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한 행보다.
러시아의 군사개입은 또 그동안 갈등 관계에 있던 우크라이나 내 친러 성향 동남부 지역과 친서방 성향 중서부 지역 간 내전을 촉발할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내전은 대규모 난민 유입 문제 등과 함께 러시아의 정치·사회 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우크라이나가 전쟁 상황에 빠지면 이미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에 처한 우크라 경제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그 여파가 러시아로 전이돼 러시아 경제가 큰 충격을 받을 것이란 전망도 러시아의 군사 개입을 주저케 하고 있다.
지난달 말부터 진행된 우크라이나의 정권 교체 과정은 이미 자국 경제는 물론 러시아 경제에도 상당한 혼란을 초래했다.
안정 기조로 돌아섰던 러시아 통화 루블화 가치가 급락하는가 하면 우크라에 투자한 러시아 은행과 기업들의 연쇄 피해가 우려되고 있다.
전쟁은 이같은 혼란을 더욱 부추길 것이 분명하다.
고유가에 기대 어렵게 경제를 꾸려가고 있는 러시아로선 역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시나리오다.
이런 이유로 지금으로선 러시아가 실제 군사 공격은 유보한 채 정치·외교전, 경제 제재, 군사력 과시 등의 전방위 압박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옥죄면서 향후 정책 결정 과정에서 러시아의 이해를 충분히 고려하도록 강제하는 정책을 쓸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러나 이같은 정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옛 소련권에서 각별한 전략적 의미를 갖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이탈할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할 경우 2008년 조지아(러시아명 그루지야)에 그랬던 것처럼 군사공격의 길을 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