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카메라는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묘비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작가(톰 윌킨슨)를 비춘다. 그가 말한다. "사람들은 작가가 스토리를 창조한다고 생각하는데, 주변에서 캐릭터와 공간을 제공한답니다."
작가는 이제 흥미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고, 배경은 다시 1968년 알프스산맥에 자리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변한다. 젊은 작가(주드 로)는 그곳에서 우연히 호텔 주인인 무스타파(F. 머레이 아브라함)를 만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작품에 영감을 주는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렇듯 영화는 초반에 국가적 보물과 같은 작가가 자기 작품의 탄생 과정을 되짚어가는 다소 복잡한 경로를 보여 줌으로써, 결국 이 영화가 문학, 그리고 그 문학에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해 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 작품이 영화, 문학과 같은 예술 매체의 원류가 된, 멋진 삶을 살았고 살고 있을 이들에게 바치는 헌정작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 곳곳에서 사건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기보다는 사진, 문서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관객 스스로 그 경과를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도록 한 점, 극 중간 중간 등장인물들이 시를 읊거나 긴 이야기를 들려 주는 장면 등은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문학의 특징을 영화에 접목하려는 재기 발랄한 시도로 읽힌다.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웨스 앤더슨 감독 스스로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점도 증거로 들 수 있겠다.
그녀는 죽기 전 미리 써 둔 유언장을 통해 이 호텔의 지배인이자 연인인 구스타브(랄프 파인즈)에게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명화를 남긴다.
하지만 마담D의 아들 드미트리(애드리언 브로디)는 유산을 독차지할 심산으로 구스타브를 어머니의 살해 용의자로 몰아가고, 구스타브는 충실한 호텔보이 제로(토리 레볼로리)와 함께 누명을 벗기 위해 기상천외한 모험을 시작한다.
이 영화에는 앞에서 소개된 배우들 외에도 윌렘 대포, 에드워드 노튼, 빌 머레이, 하비 케이틀, 레아 세이두, 시얼샤 로넌, 제프 골드브럼, 오웬 윌슨 등 웬만한 주연급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는 '문라이즈 킹덤'(2012), '다즐링 주식회사'(2007), '로얄 테넨바움'(2001) 등 웨스 앤더슨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비중의 많고 적음을 떠나 모든 캐릭터에 독특한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는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 덕이라는 것을 이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리라.
민머리를 하고 가슴팍에 우스꽝스런 문신을 그려넣은 하비 케이틀, 프랑켄슈타인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코믹한 윌렘 대포 등의 모습을 또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웨스 앤더슨 특유의 미장센 미학은 이 영화에서 절정을 이루는 모습이다. 호텔의 외관과 이를 둘러싼 대자연의 풍경은 동화 속 그림 같고, 인물들이 입은 옷과 그들이 활동하는 공간은 하나 하나 철저하게 계산된 듯 세련되고 아기자기하다.
이 영화의 배경이 제1차 세계대전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파시즘의 창궐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1932년의 유럽이라는 점은 의미 심장하다.
극중 구스타브와 제로를 비롯해 이 둘을 돕는 인물들은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인간적 양심을 지키려 애쓴다.
그리고 기성세대의 귄위에 저항한 68혁명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간 1968년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종전과 달리 자유분방한 지배인 장(제이슨 슈워츠맨)을 통해 유럽의 변화한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속에 유럽의 역사를 녹여내고 싶었다던 감독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극중 구스타브는 "도살장처럼 변해 버린 잔혹한 세상에도 희망은 존재한다"고 전한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 세상의 희망이 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는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인류애의 양심이 있다. 세상의 모든 구스타브에게 바치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100분 상영, 3월20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