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국제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가 마치 스파이 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미국 고객의 조세회피를 도운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상원의 상임 소위원회는 25일(현지시간) 보고서를 통해 크레디트스위스가 2002~2008년 사이에 총 2만2천명의 미국 고객의 조세회피를 중개했다고 밝혔다. 이는 소위원회가 지난 2년간 벌여온 조사의 중간 결과물이다.
이 보고서는 지난 2006년 당시 약 1만9천명의 미국인이 크레디트스위스에 50억 달러(약 5조3천262억여원)의 비자금을 감춰놓고 있었다면서 이 은행에 계좌를 개설한 미국인은 한때 2만2천명이 넘었고 이들이 맡긴 돈만 135억 달러(약 14조3천808억여원)를 초과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소위원회는 14개의 투자은행을 조사하고 있으며, 크레디트스위스의 조세 회피 건과 관련해 26일 브래디 도건 크레디트스위스 CEO, 로버트 샤피어 자산운용 부문 대표 등 중역들을 대상으로 청문회를 연다고 스위스 언론들은 보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크레디트스위스의 미국 고객에 대한 '영업방식'은 마치 한 편의 첩보영화를 연상하게 했다.
이 은행은 취리히 공항에 지점을 열고 미국에 직원을 직접 보내 조세회피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안했다.
직원들은 여행용 비자를 발급받아 미국행 목적을 숨기는가 하면 고객과 만난 자리에서 주위 시선을 피하려고 계좌명세서를 잡지 사이에 껴서 전달하기도 했다.
조세회피처에 유령회사를 설립하고 관리하는 일을 대행한 것은 물론, 비밀 엘리베이터에서 고객을 만나 일을 처리하거나 각종 서류를 파쇄했다.
또한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뉴욕에서 `스위스 볼'이라는 행사와 플로리다에서 골프 대회를 매년 후원하기도 했다.
지난 2008년까지 이런 영업을 위해 모두 1천800명의 직원이 연루됐으며, 제3의 회사들을 통해 미국인 고객들이 비자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신용카드를 제공하기도 했다.
크레디트스위스 은행은 그러나 지난 2008년 스위스 최대은행인 UBS의 탈세 스캔들이 터지자 이때부터 2011년까지 비밀영업 행위를 중단하면서 미국인 고객들에게 계좌를 폐쇄하고 미국 당국에 신고해 달라고 요청하는 등 이제까지의 활동에 대한 은폐 작업을 벌였다.
이번 조사를 이끈 칼 레빈 상임 소위원회 위원장은 "크레디트스위스의 이런 행위는 미국 재정에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고 지적했고, 존 매케인 상원의원도 "이는 조직적인 행위"라며 크레디트스위스가 이러한 조세회피 중개를 일상적으로 벌여온 것 같다고 말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미국 고객의 초국가적 거래를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신고를 하지 않은 혐의로 1억9천600만 달러를 배상하기로 SEC와 지난주 합의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UBS는 지난 2009년 조세회피 중개 혐의로 미국 당국에 7억8천만 달러의 벌금을 물은 바 있다.
레빈 위원장은 "이제 세금 회피를 위해 해외에 수십억 달러의 비자금을 빼돌렸던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일 시간"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