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을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두발 달린 짐승처럼 취급하며 아무런 도덕적 수치심도 없이 부려먹고 때리는 영화 '노예12년'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그렇게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국의 수치스런 과거를 노예12년은 눈이 시리게 서정적 영상으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노예12년은 1841년 어느 날 갑자기 납치돼 12년간 노예로 살았던 바이올린 연주가 솔로몬 노섭이란 실존인물에 관한 영화다.
1800년대 중반 미국은 노예수입이 금지되자 흑인납치사건이 만연했다. 미국 남부를 중심으로 노예제가 존재하던 시절이라 자유롭게 살던 자유주(州)의 흑인을 노예주로 쥐도 새도 모르게 팔아치운 것.
자유인으로 태어나 단란한 가족을 꾸렸던 노섭은 당시 만연하던 흑인납치사건의 희생자가 되면서 무려 12년간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다.
우연히 노예제에 반대하던 캐나다인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출된 그는 1년 뒤인 1853년 자서전 '노예12년'을 출간했는데 이 소설은 당시 이례적으로 3만부 이상이 판매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과 함께 당시 흑인노예의 인권유린 참상을 세상에 알린 대표적인 책으로 손꼽힌다. 노섭은 남은 생을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는데 연설과 강연 도중 행방불명돼 사망년도는 정확하지 않다.
노섭의 자서전을 스크린에 옮긴 이 영화는 노섭의 비극적 12년을 별다른 기교 없이 담담하게 보여준다.
노섭이 친구처럼 다가온 두 백인에게 속아 납치를 당해 노예수용소에 갇히고 다른 노예들과 함께 배를 타고 어딘가로 팔려가 노예생활을 시작하면서 겪는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미국 남부의 목가적 풍경과 함께 펼쳐 보인다.
데뷔작 '헝거'부터 '셰임' 그리고 '노예12년'까지 실존인물의 삶을 스크린에 옮기고 있는 흑인 감독 스티븐 맥퀸은 특유의 진지하고 건조한 방식으로 이 영화를 풀어간다.
실화의 극적 재구성을 통해 어떤 메시지나 의도된 감정을 전하기보다 그저 한 인물의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은 비극적 상황을 건조하게 보여줌으로서 관객들로 하여금 직접 느끼게 한다.
이 영화에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솔로몬이 자신을 괴롭히는 백인 감시관을 참다못해 폭행하고 그 벌로 손발이 묶이고 밧줄에 목이 걸린 채 나무에 매달려 한나절을 보내는 장면이다.
까치발로 겨우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밧줄의 조임을 지탱하는 그의 입에서는 '큭큭' 격한 숨이 새어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농장주의 아이들은 풀밭을 뛰어다니며 놀고, 다른 노예들도 아무 일 없는 듯 일상을 보낸다. 그나마 양심적인 백인 여주인이 베푼 호의라곤 노섭이 살해되지 않게 살려둔 정도다.
42도의 불볕더위에서 이 장면을 촬영한 치웨텔 에지오포는 "약 170여 년 전 솔로몬이라는 실제 인물과 연결되는 느낌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셰임에서 주연배우 마이클 패스벤더의 공허한 눈빛이 강렬하게 남듯, 이 영화는 노섭을 연기한 에지오포의 두려움과 슬픔, 절망 그리고 저 깊숙이 숨어있는 가느다란 희망이 교차하는 커다란 눈망울이 생생히 기억된다.
노예12년은 어떤 부당함도 견디고, 어떤 인권유린에도 눈을 감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견뎌낼 수밖에 없었던 한 흑인 남성의 생존 기록이다. 동시에 흑인을 짐승 취급하며 자신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괴물로 전락한 백인, 나아가 인간의 난폭한 역사다.
그 역사는 흑인 대통령이 배출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조용히 자행되고 있다. 인종차별부터 아동학대까지 사회적 약자를 버젓이 학대하고 유린하는 모든 이가 바로 자신이 갈구하는 흑인 여성의 등을 벗기고 채찍을 휘두르는 포악한 농장주 에드윈(마이클 패스벤더)의 복제품들이나 다름 아니다.
맥퀸은 "160년이나 지난 이 책의 역사적 가치를 21세기에 다시 한 번 되새기고 현대인들에게 솔로몬의 용기와 자존심이라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나누고자 했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다.
노예12년은 다음달 2일 개최될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조연상 여우조연상 등 무려 9개 부문에 후보를 올렸다. 만약 맥퀸이 이 영화로 수상의 영예를 안으면 아카데미 최초로 작품상 혹은 감독상을 수상하는 흑인 감독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