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EU와 협력협정 체결을 목전에 둔 우크라이나를 러시아 쪽으로 끌어들였을 때만 해도 승리는 푸틴 대통령에게로 돌아가는 듯했지만 갑작스럽게 야권이 권력을 장악한 지금으로선 푸틴 대통령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친러시아 성향을 보여온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실각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정세 반전을 시도하는 것이 어렵게 됐지만 그렇다고 친서방 성향의 야누코비치 반대 세력이 새 정권을 구축해 유럽과의 통합을 시도하는 과정을 손을 놓고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크라이나 상황에 대한 러시아 내부의 여론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 국민 상당수는 우크라이나에 여전히 깊은 유대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서 떨어져 나가 유럽 쪽으로 기우는 상황이 푸틴 대통령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 우크라 주재 자국 대사 소환으로 항의 표시
러시아는 일단 우크라이나 주재 자국 대사를 '상황 협의'를 이유로 본국으로 소환함으로써 야누코비치를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한 우크라이나의 기존 야권 세력에 항의를 표시했다.
외무부는 23일(현지시간) 자체 웹사이트에 올린 언론보도문을 통해 "우크라이나 상황 악화와 현 정세에 대한 종합적 분석의 필요성 때문에 우크라이나 주재 미하일 주라보프 대사 소환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사 소환엔 유럽화를 제1의 국정 과제로 선언한 알렉산드르 투르치노프 신임 의회 의장 겸 대통령 권한 대행에 대한 항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러시아 외무부는 또 이에 앞서 이날 이루어진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간 전화통화 내용을 소개하는 보도문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야권 지도자들이 서명했던 협정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21일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주요 야당 지도자들이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는 개헌과 조기 대선 등에 합의한 뒤 프랑스·독일·폴란드 3국 외무장관과 함께 서명한 협정을 염두에 둔 요구였다.
외무부는 그러면서 "키예프의 권력을 장악하고 무기를 반납하길 거부하면서 폭력에 의지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야권이 협정 이행을 거부하고 있다"면서 "이 협정에는 여러 유럽국가대표들이 서명했으며 미국도 공식적으로 이 협정 체결을 환영했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야권의 합의 파기와 야누코비치 대통령 축출을 여전히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향후 이 문제를 새로 들어선 우크라이나 정권과의 협상에서 압박 카드로 활용할 것임을 내비친 것이다.
이같은 불만 표시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당장 강력한 대응 조치를 취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그보단 우크라이나 정국 진행 상황을 지켜보며 장기적 대응에 나설 확률이 높다.
◇ 對우크라 150억 달러 차관 제공 미루며 압박 가능성
EU에 대응하는 옛 소련권 경제통합체인 '유라시아경제연합'(EEU) 창설에 큰 시장과 천연자원을 가진 우크라이나가 꼭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단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말 우크라이나에 약속한 150억 달러의 차관 제공을 보류하며 압박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현재까지 150억 달러 중 30억 달러의 지원이 이뤄졌으며,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2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지켜본 뒤 2차분 20억 달러를 추가 지원할지를 결정할 것이라고 선을 그어뒀다.
러시아가 유보적 입장을 취하는 사이 EU는 공세적 태도를 보이고 나섰다. 유럽의회 외교위원장 엘마르 브록은 23일 우크라이나 TV 방송 '1+1'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새 정부가 수립되고 나면 EU가 우크라이나의 개혁 추진을 위해 200억 유로를 지원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브록은 "이 자금이 우크라이나의 디폴트를 막기 위해 즉각 지원돼야 한다면서 "EU의 지원이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위한 보다 나은 경제 환경 조성과 EU와의 협력협정 체결을 위한 준비에 사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같은 EU의 공세에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수입 제한 확대 등의 조치를 고려할 가능성도 있다.
푸틴 대통령 입장에서는 자신이 지원하던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쫓겨나고 야권이 권력을 장악한 와중에서도 2004년 이른바 오렌지 혁명의 주역인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가 전면에 등장해 아주 상황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체로 서방 친화적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티모셴코이지만, 그녀는 총리 시절인 2009년 러시아에 유리하게 가스수입 계약을 맺도록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복역까지 했다. 그 당시 계약 당사자가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던 푸틴이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푸틴 대통령이 2010년 우크라이나 대선 때 티모셴코를 지지했다는 소문을 부인하긴 했지만, 양쪽이 총리 재직 시절 좋은 협력관계를 구축했다"고 보도했다.
◇ 군대 투입 등 극단 조치 취할 가능성은 작아
야누코비치를 지지하는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의 반발로 상황이 악화할 경우 러시아인 보호를 명목으로 군사개입을 하는 상황도 상정할 수 있지만 상당한 정치·외교적 부담이 뒤따를 수 있어 가능성은 커지 않아 보인다.
수전 라이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일찌감치 러시아의 군사 개입에 대해 "중대한 실수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선 상태다.
우크라이나가 친러시아 성향의 동남부 지역과 친유럽 성향의 서부 지역으로 갈려 있는 점도 푸틴 대통령의 선택에 주요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우크라이나의 정국 수습 과정에서 친러시아 지역이 차별을 받으면 푸틴 대통령이 해당 지역과만 독점적으로 경제 협력관계를 맺는 등 대응조치에 나설 수도 있다고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지적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백악관 국가안보담당보좌관은 24일자 FT 기고문에서 "우크라이나엔 러시아 및 EU와 함께 경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핀란드식 모델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WP는 푸틴 대통령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중대한 차질이지만 완패는 아니다"라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여러가지 레버리지를 가지고 있고 이를 활용할만한 첨예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