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며느리는 헤르츠-좀머가 지난 21일 건강이 악화돼 런던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가 이날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
1903년 11월 26일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그녀는 5살때 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나치 수용소에서도 음악을 놓지 않고 종종 피아노 연주회를 열어 유대인 수감자들에게 삶의 위안을 주었다.
그녀의 삶은 '백년의 지혜'라는 책을 통해 널리 알려졌고 '더 레이디 인 넘버6-음악이 내 삶을 구했다(The Lady in Number 6-Music saved my life)'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됐다. 이 다큐멘터리는 오는 3월 2일 시상식을 갖는 제 86회 아카데미상 후보로 올라 있다.
다큐멘터리 제작자 프레데릭 보보트는 "우리 모두 그녀가 그렇게 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면서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가 오스카상을 타는 것을 보게 되리라 의심치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그녀는 1931년 남편 레오폴드 좀머와 결혼해 나치가 체코를 침공하기 2년 전인 1937년 아들 슈테판을 얻었다. 이후 일가족은 1943년 테레진시에 설치된 수용소로 보내졌다.
당시 약 14만 명의 유대인이 테레진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이중 3만3천430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8만8천여명은 아우슈비츠나 다른 수용소들로 보내진 뒤 대부분 희생됐다.
그녀의 남편도 독일 뮌헨 부근의 다하우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발진티푸스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1942년 폴란드의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이송된 뒤 연락이 끊겼다.
가족과 헤어진 뒤 그녀는 음악에 몰두해 쇼팽의 연습곡 24곡을 하루 8시간씩 연습했다.
테레진 수용소의 경우 유대인 수용자들에 음악을 허용해 그녀는 수감된 유대인들을 위해 콘서트를 열 수 있었다. 그녀의 아들은 체코 작곡가 한스 크라사가 작곡한 아동용 오페라 '브룬디바르'에서 참새역으로 출연했다.
이 오페라는 테레진 수용소의 대표작으로, 1944년 수용소를 방문한 국제적십자사 대표단 앞에서 공연되는 등 최소 55차례나 공연됐다.
1945년 수용소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면서 그녀와 아들은 2만명이 못 되는 유대인들과 함께 풀려날 수 있었다.
그녀는 이후 체코를 떠나 1986년까지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한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다 런던으로 이주했다. 첼리스트로 활동한 아들은 2001년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그녀는 수용소 시절에 대해 "음악을 할 수 있어서 항상 웃을수 있었다"면서 "늙고 외롭고 병든 사람들이 음악회에 왔으며 음악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준 양식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백년의 지혜'라는 책에 담아낸 뉴욕의 피아니스트 캐롤라인 스토신저는 "많은 사람들이 신조를 옹호하면서도 신조에 따라 살지 못한다"면서 "그녀는 음악은 언어이며 이 음악의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법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