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림(42) 게임 캐스터를 수식하는 두 가지 말은 상반적이다. e스포츠 업계에선 ‘여신’으로 불리지만 집에선 ‘똑순이’로 통한다. 정 캐스터는 2000년 경인방송 ‘게임스페셜’로 데뷔한 뒤 14년 동안 e스포츠 현장을 지켜왔다. 그가 마이크를 잡으면 일견 아이들 놀이처럼 보이는 전자게임도 올림픽 못지않은 스포츠가 된다. 경쾌한 목소리와 재치 있는 입담은 남성 위주의 e스포츠 세계에서 꿋꿋이 인기를 누리게 만든 밑천이다.
정 캐스터는 욕심도 많다. 하나 뿐인 아들을 지금껏 쉬지 않고 일하면서 멋진 중학생으로 키워냈다. 올해 16세인 아들은 그가 힘든 방송일을 잘 이어나갈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됐다. 게임 중계방송 일을 하는 엄마를 한 없이 자랑스러워하는 아들은 정 캐스터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뿜어주는 존재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는 모자라기보다 오래 두고 사귄 벗에 가깝다.
■ 방송 시작하면 아직도 가슴 뛰어
정 캐스터를 지난 17일 서울 용산 e스포츠 스타디움에서 만났다. 그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칭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운 좋게 게임 캐스터 일에 뛰어들어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방송 시작 전 오프닝 음악이 울리면 행복해서 가슴이 뛴다”고 했다. 그가 자신의 일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정 캐스터는 이달 초 열린 ‘2013 대한민국 e스포츠 대상’에서 특별상인 방송상을 수상했다. 주최 측이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이번에 처음 만든 상이다. 정 캐스터는 이날 결국 눈물을 쏟았다. e스포츠 외길인생을 걸어온 끝에 어릴 적 꿈이었던 방송인으로서 당당히 인정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4년 동안 어떻게 하면 게임 중계를 더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쉽지 않은 길을 앞만 보면서 달려왔는데요. 남몰래 애써온 것들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있다는 생각에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그는 “게임 캐스터 일은 여전히 어렵다”고 했다. 특히 “여성 캐스터로서 목소리의 한계는 일을 마칠 때까지 안고 가야할 숙제”라고 고백했다. 스포츠 중계는 소리를 지르는 등의 열띤 행동을 보여줘야 하는데 여성 캐스터의 경우 목소리를 높이면 날카롭게 들릴 수 있어 자칫 분위기를 흐릴 수 있다는 것이다. 스포츠 중계 현장에서 여성 캐스터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 끊임없이 공부하는 게임 캐스터
정 캐스터는 초등학교 시절 방송반 활동을 하면서 아나운서의 꿈을 갖게 됐다. 아나운서에 대한 동경은 대학 방송국 활동까지 이어졌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SK텔레콤에서 사내 아나운서로 일했다. 이후 임용고시를 본 뒤 교육자의 길을 걷고자 했으나 임신을 하게 돼 뜻을 접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온다고 했던가. 대학 방송국 선배였던 이정한 경인방송 해설자가 게임 캐스터 일을 소개시켜 준 것이 오늘의 그를 만든 계기가 됐다. 당시 임신을 했던 정 캐스터는 집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취미로 ‘스타크래프트’를 즐겼다. 이런 그를 지켜보던 이정한 해설자는 방송과 게임을 모두 할 수 있다며 게임 캐스터 일을 추천해줬다.
지금껏 14년 동안 이 일을 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e스포츠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e스포츠는 다른 스포츠처럼 보고 즐기는 또 하나의 문화죠. 하지만 중계방송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자리를 잡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돼요. e스포츠 중계는 밑그림에 색을 칠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는데요. 게임 캐스터 입장에서 보면 나만의 색을 입히는 작업이에요. 하면 할수록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 캐스터는 게임 중계방송을 잘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공부의 대상이 다름 아닌 게임이다. 이러한 이유로 정 캐스터에겐 50여 권의 노트가 보물이다. 14년 세월의 흔적을 담아낸 이 노트에는 각종 게임에 대한 그 만의 분석이 빼곡히 적혀있다.
“어떨 때는 갑자기 방송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시작 며칠을 앞두고 밤을 새우면서 게임을 공부하기도 했어요. e스포츠를 중계방송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잘 알아둬야만 해요. 리그오브레전드의 경우 특정 챔피언(영웅 캐릭터)만 알기보다는 모든 챔피언을 꿰고 있어야죠.”
■ 게임을 좋아하는 똑순이 엄마
그는 ‘워킹맘’이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인 그의 아들은 최고의 후원자다. 사춘기를 겪을 시기라 부모와 트러블도 있을 뜻 하지만 큰 홍역 없이 반듯하게 자라줬다. 공부를 잘해라 보다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교육한 것도 있지만 게임으로 서로 소통하는 시간이 많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아들은 제가 게임 캐스터로 활동하는 것이 늘 자랑스럽다고 얘기해줘요. 가끔 힘들거나 피곤해하면 기운 내라고 말해주기도 하고요. 제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밝고 에너지가 넘쳐 좋데요. 무엇보다 게임을 소재로 대화하는 시간이 많으니까 다른 부분에서도 소통하기 쉬워요. 리그오브레전드, 스타크래프트 등 여러 가지 게임을 잘 알고 있는 엄마는 거의 없을 것 같아요.(웃음)”
워킹맘으로서 아쉬운 점을 물었더니 아이에게 완벽하게 집중하지 못하는 점을 꼽았다. 예컨대 또래 엄마끼리 모여 공부와 관련된 정보를 교환한다던지, 학교를 여러 번 찾아가 본다던지 등이다. 정 캐스터는 워킹맘으로서의 삶을 아들에게 귀감을 주는 일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삶의 모범을 보이고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사정상 아이에게 100% 올인 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아들에게 멋진 엄마, 최고의 엄마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레요. 무엇보다 어떠한 일을 하던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하는 엄마로서 보여줄 수 있었으면 해요.”
■ 게임 캐스터는 매력적인 직업
정 캐스터는 40대답지 않은 동안과 몸매로 여전히 게임팬들 사이에서 여신이라고 불린다. 화려한 외모 덕에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을 것이란 ‘청담동 며느리’ 소문도 있다. 맞는 말인지 묻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어렵게 자랐어요. 손수건을 팔았고 일식집에서는 서빙도 해봤죠. 알탕 두개를 담아 옮기려면 어찌나 무겁던지. 학비를 벌 목적이 컸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로 임했죠. 대학교 1학년 때는 백화점 매장에서 둘이서 손수건을 팔았는데요 상대방 보다 더 많이 팔아야겠다는 의욕으로 열심히 일했던 게 생각나네요.(웃음)”
인터뷰 뒤 ‘차가운 미인 캐스터’라는 고정관념은 깨졌다. 털털함과 유쾌함으로 똘똘 뭉친 뜨거운 사람이었다. 인터뷰하면서도 일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던 그는 뼛속까지 게임 캐스터였다. 마지막으로 게임 캐스터를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14년 관록의 뼈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게임 캐스터는 진입 장벽이 상당히 높은 직업이에요. 일단 아나운서의 자질이 있어야 하고 게임도 좋아해야 하죠. 특히 여성이라면 소리를 지를 때 너무 날카롭거나 듣기 싫은 소리가 나와서는 안돼요. 이 부분이 여성 캐스터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에요. 저 역시도 그렇죠. 하지만 분명 게임 캐스터는 매력 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대신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도전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