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는 푸른 색이 밑으로 내려오면서 옅어지는 의상을 입고 하늘하늘 우아한 여왕의 자태를 뽐냈습니다. 여성 락스타 에이브릴 라빈이 부른 비틀스 멤버 존 레넌의 '이매진(Imagine)' 선율에 맞춰 은반을 고요하게 수놓았습니다.
그리고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진행된 인터뷰. 생각해보니 이번 올림픽에서 김연아의 마지막 인터뷰였습니다. 혹시 소치 공항이나 귀국한 뒤 인천공항에서 회견을 갖겠지만 소치올림픽이 막을 내리기 전 마지막이 될 인터뷰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김연아는 소치 입성 이후 꽤 많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한국과 일본 등 수많은 취재진에 둘러싸였고, 당일 오후 진행된 소치 연습 링크 첫 훈련과 메인 링크 첫 훈련 뒤, 경기 전날까지 취재진과 문답했습니다.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 경기 후, 또 코리아하우스에서 한국 취재진을 위해 마련된 회견, 그리고 메달 수여식 뒤 인터뷰까지.
경기 전에는 강력한 우승 후보답게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경기 후에는 석연찮은 판정 때문에 더욱 관심을 불러모았습니다.
첫 질문과 답변 이후 잠시 침묵이 흐르자 김연아는 취재진을 보더니 "됐어요?" 라며 라커룸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기자라면 아무리 많은 인터뷰를 했어도 궁금증이 남기 마련, 행여 인터뷰가 끝날까 재빨리 다음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마지막이라 어떤 특별한 감정이 있었을까. 김연아는 "전혀 그런 건 없었고 공연이기 때문에 집중하느라 그런 생각 안 들었다"면서 "한국에서도 공연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역시 관심은 이번 대회 논란이 된 판정이었습니다. 외신 기자들의 질문에 김연아의 대답은 경기 직후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경기 끝나고 판정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본 적 없고요. 결과가 어떻든 간에 경기가 잘 끝났다는 것에 만족스럽고..."까지 답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누군가 김연아의 어깨를 툭 치면서 "퀸 연아, 넘버원!"을 외치고 가는 겁니다. 바로 김연아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공연을 마친 아이스 댄스 은메달리스트 스콧 무어(캐나다)였습니다. 개최국 러시아의 아델리나 소트니코바가 여자 싱글 금메달을 땄지만 진정한 챔피언은 김연아라는 의미였습니다. 김연아와 취재진 사이에 잠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웃음을 가라앉힌 김연아는 "항의한다고 해서 결과가 바뀔 것 같진 않아요"라면서 "그것에 대한 억울함, 속상함은 전혀 없고요,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 싶습니다"고 답변을 마무리했습니다. 이어 "계속 말씀드렸듯이 결과에 대해서 끝난 다음에 되새겨본 적 없고요. 저보다 주변에서 더 속상해 하시는 것 같은데 결과에 대해서는 뭐..."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경기 후 무대 뒤쪽에서 김연아가 휴지로 눈물을 닦아내는 장면이 올림픽 주관방송사인 미국 NBC의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경기 중계나 방송 인터뷰에는 나오지 않았던 모습입니다. 국내 방송사의 한 관계자는 "올림픽 중계권의 60%를 가진 NBC만 들어가서 찍을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연아는 확대 해석을 강하게 경계했습니다. "계속 분위기 자체가 점수나 결과에 대해서 너무 치우쳐져 있어서 내가 눈물 흘린 이유를 그쪽으로 돌리시는 것 같은데, 계속 이야기하지만 100퍼센트 솔직하게 눈물이 난 것의 의미는 전혀, 그런 억울하다, 속상하다 이런 것 '저~언혀'(전혀를 강조했습니다.) 없고요. 믿어 주셔도 되고, 저는 금메달 땄어도 그렇게 펑펑 울었을 것 같아요."
눈물의 의미는 순수했고, 간단했습니다. 그동안 힘겨웠던 자신과의 싸움. "그냥 그동안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맺혀온 게 한번에 터졌다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의 눈물이었고. 전혀 그런 것 없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고요."
그리고 소치올림픽 마지막 인터뷰의 마지막 답변, 솔직했습니다. "계속 오해가 있는데 제가 너무 괜찮은 척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제가 뭐하러 (괜찮은) 척을 할 이유도 없고 저는 정말 끝난 걸로 너무나 만족스럽고 시합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금메달에 대한 욕심 없었고 제가 마지막 대회를 잘 마무리했다는 것에 만족스럽습니다."
18년 선수 생활을 하면서 달고 살았던 허리와 고관절 등 부상, 평생의 목표였던 밴쿠버올림픽 금메달, 이후 찾아온 허탈과 상실감, 그 뒤 약 20개월 동안의 방황, 두 번째 올림픽 도전의 쉽지 않은 결정, 그리고 마침내 심판, 판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훌륭하게 이겨낸 김연아. 스스로 120점을 줘도 아깝지 않을 여정이었습니다.
때문에 마지막 인터뷰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낸 듯 깃털처럼 가벼웠습니다. 피겨 여왕의 무거운 왕관을 내려놓은 듯 비로소 홀가분했습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으로 가득했던 18년 세월 소치 얼음판에 조용히 묻고 가는 여왕의 마지막 인터뷰. '아디오스, 피겨 여왕. 아디오스 연아.'
p.s-저는 소치 취재 이후 지난 21일 13번째 '임종률의 소치 레터'로 '여왕이여! 왜 울지 않은 겁니까?"라는 제목의 편지를 한국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울긴 울었더군요. 그 태연자약한 표정과 담담한 말투에 감쪽같이 저 혼자 속았던 겁니다.
그러나 오늘(23일) 14번째 편지에서 김연아가 밝힌 눈물의 의미는 정말인 게 분명해보입니다. 프리스케이팅 경기 후, 그러니까 소트니코바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한 뒤 김연아의 인터뷰 사진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 어떤 억울함이나 속상함이 있는 얼굴이라고는 '저~언혀' '100퍼센트' 생각하기 어려울 겁니다. 당시 사진을 붙여봅니다. 믿을게요. 믿어주셔도 된다고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