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정도, 무례함도, 라이벌도' 모두 안아준 '여왕' 김연아

'얘, 너 갖고 싶으면 가져' 김연아가 21일 새벽(한국 시각) 소치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석연찮은 판정에 금메달을 놓치고도 미소를 지은 채 금메달리스트 아델리나 소트니코바, 동메달을 딴 카롤리나 코스트너(왼쪽부터)와 시상대에 올라 포즈를 취하고 있다.(소치=대한체육회)
여왕은 모두를 품에 안았다. 원망도, 울분도, 분노도 없었다. 비워진 마음으로 넓게 안았고, 따뜻하게 품었다. 한결 더 성숙해진 여왕 앞에는 판정 논란도, 라이벌도, 무례함도 더 이상은 없었다.

김연아는 21일(한국 시각) 러시아 소치 아들레르의 코리아 하우스에서 열린 한국 선수단 메달리스트 기자회견에 나섰다. 전날 소치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은메달리스트 자격으로 온 것이다.

금메달이 아니었다. 완벽한 연기에 올림픽 2연패가 확실해 보였지만 금메달은 개최국 러시아 선수의 목에 걸렸다. 비난이 빗발쳤다. 한국은 물론 미국 NBC, 프랑스 레퀴프 등 유수의 해외 언론들도 러시아의 홈 텃세를 지적했다.

A급 국제대회 우승 경험이 한번도 없는 아델리나 소트니코바는 올림픽 큰 무대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한 차례 점프 실수에도 클린 연기를 펼친 김연아를 앞섰다.

하지만 김연아는 마음을 비웠다. 이날 회견에서 김연아는 어머니 박미희 씨와 주고받은 메시지 내용을 공개하면서 "점수에 대한 얘기가 많이 있어 끝났으니까 열받지 말고 정리하면서 자유를 즐기자, 나보다 더 간절한 사람에게 금메달을 줬다고 생각하자 얘기했다"고 밝혔다.

생애 한번 출전도 어려운 올림픽에서 그것도 금메달, 선뜻 포기하기 어려운, 그래서 더 억울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김연아는 이미 밴쿠버올림픽을 제패한 금메달리스트답게 통크게 양보했다. '그래, 너 가져가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항의할 뜻도 없었다.


'얘, 너도 남 얘기 좀 듣지?' 김연아가 21일(한국 시각) 소치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메달리스트 기자회견에서 답변하는 카롤리나 코스트너(오른쪽)를 바라보고 있다. 그 사이에 앉은 아델리나 소트니코바는 회견장 가운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모습.(소치=임종률 기자)
그런 김연아였음에도 소트니코바는 여왕의 역린을 건드렸다. 전날 메달리스트 기자회견 말미 김연아가 질문에 대답하는 도중 양해없이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취재진이 술렁거릴 정도의 무례함이었다. 김연아도 일단 "지금껏 기자회견을 많이 했는데 보통 끝나면 다 같이 가거든요"라면서 "마지막 질문이 와서 대답하고 있는데 나가길래 (속으로) '뭐지?' 했다"고 불쾌함을 에둘러 드러냈다.

하지만 이어 "(소트니코바가) 나보다 훨씬 먼저 와서 회견을 하고 있었다"면서 "의상도 안 벗고 와서 상황이 다르니까 갔겠거니 한다"고 털어버렸다. 간절하다길래 흔쾌히 금메달까지 더 마음에 두지 않기로 했는데 이런 비매너까지, 그러나 그것마저도 여왕은 안아주기로 했다.

평생의 라이벌이던 아사다 마오, 김연아와 동갑내기에 한국과 미묘한 관계에 있는 일본 국적의 피겨 스타 아사다는 10년 세월을 함께 보내왔다. 한일 양국의 피겨 스타 라이벌 대결에 한때 김연아는 "왜 같은 시대에 태어났을까" 할 정도로 엄청난 중압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따뜻하게 안았다. 이미 김연아는 밴쿠버올림픽 역대 최고점으로 금메달을 따내며 아사다와 라이벌 시대를 종식했다. 아사다는 도전자의 입장이었다.

아사다는 그러나 이번 올림픽 쇼트프로그램에서 처참했다. 엉덩방아를 찧거나 점프 실패로 55.51점, 16위 충격에 빠졌다. 일부 몰상식한 러시아 팬들은 경기 중 비웃음을 터뜨렸다. 일본 언론마저 등을 돌렸다.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자극적이고 자국 내 팬들의 인신 공격이 이어졌다.

프리스케이팅에서 아사다는 이를 악물었다. 성공률이 지극히 낮았던 주무기 트리플 악셀도 깔끔하게 해내며 최고의 연기를 펼쳤다. 혼신의 경기 끝에 전날 비웃음을 환호로 바꾼 아사다는 울음을 터뜨리며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울지마, 내가 안아줄게' 김연아는 21일(한국 시각) 프리스케이팅에서 최고의 연기로 전날 쇼트프로그램 부진을 씻고 울음을 터뜨린 일본 아사다 마오에 대해 "나도 울컥했다"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소치=대한체육회, 방송화면 캡처)
김연아도 마음이 아팠다. 같은 선수로서, 기대를 한몸에 받는 스타로서 그 고충을 알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에서 김연아는 "어제 경기 전 몸 풀러 왔을 때 아사다가 경기를 하고 있어서 TV로 봤는데 울먹일 때 저도 울컥하더라고요"라며 짠했던 마음을 밝혔다.

"저희 둘만큼 꾸준히 비교 당하고 같이 경기하고 그런 선수도 얼마 없었을 것 같다"면서 평생의 라이벌 대결을 돌아본 김연아는 "10년 넘게 라이벌이라는 상황 속에서 경기해서 아사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라고 꼽았다.

이어 "아사다는 나처럼 은퇴하지 않아 해줄 말이 좀 그렇지만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고 얘기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때는 원망도 했던 애증의 라이벌을 끝내 품에 안은 것이다.

"17, 18년 선수 생활을 마무리해 홀가분하다"는 김연아. 모든 것을 버린 마음 속에 다시 모두를 안아준 피겨 여왕의 품은 넓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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