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점프, 우아한 스핀, 애절한 표정 연기로 수년간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김연아. 아쉽지만 이제 그녀의 연기는 ‘갈라쇼’를 통해서만 만나볼 수 있다.
1996년 피겨스케이팅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 한 소녀가 등장했다. 연습장이 없어 이곳저곳을 전전했고, 발에 맞는 스케이트를 구하려 일본까지 넘어가야 할 정도로 한국은 피겨 불모지였다. 하지만 소녀는 피겨 불모지에서도 꽃을 활짝 피었다. 이름은 김연아. 바로 수년 뒤 ‘피겨여왕’이 된 이름이다.
그리고 ‘여왕’에 오르는 길에는 항상 아사다 마오라는 이름이 따라다녔다.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난 아사다는 일본이 자랑하는 천재였다. 주니어 시절부터 트리플 악셀을 구사하며 김연아보다 앞서있었다. 김연아가 “왜 같은 시대에 태어났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 물론 이제는 “왜 김연아랑 같은 시대에 태어났을까”라는 아사다의 한숨으로 바뀌었다.
김연아 성장의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아사다였다. 하지만 2005-2006시즌 주니어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딴 뒤 입장이 바뀌었다. 김연아를 의식한 나머지 실수를 연발하는 아사다와 달리 김연아에게 아사다는 자극제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사다가 트리플 악셀에 의존했던 반면 김연아는 자신만의 장점을 극대화시켰다. 전체적인 밸런스를 높였고, 황홀한 표정 연기를 덧붙여 팬들은 물론 심판들의 마음까지 녹였다.
2006년 김연아는 처음 시니어(성인) 무대에 데뷔했다. 등장하자마자 ‘록산느의 탱고’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김연아의 시니어 무대 등장과 함께 대한민국도 피겨를 보는, 아니 김연아를 보는 행복에 빠졌다.
2009년 세계선수권 우승에 이은 2010년 밴쿠버 올림픽. 김연아는 세계신기록(합계 228.56점)과 함께 ‘피겨여왕’의 자리에 등극했다. 더 이상 라이벌도, 적수도 없었다.
올림픽이 끝난 뒤 김연아는 은퇴를 고민했다. 최고 목표를 이룬 뒤의 상실감이었다. 방황과 함께 1년을 쉬었고, 2011년 4월 세계선수권에서 빙판에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빙판을 떠났다. 공식 은퇴는 아니었지만, 복귀 여부도 알 수 없었다.
대신 평창 올림픽 유치전에 전면적으로 나섰고, 유창한 영어 프레젠테이션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는 방황하던 김연아가 마음을 다시 잡은 계기가 됐다. 2012년 7월 김연아는 “소치 올림픽에 도전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돌아왔다.
2013년 세계선수권. 김연아는 다시 팬들 앞에 섰다. 그리고 우승과 함께 3장의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했다. 후배 박소연, 김해진(이상 17)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것. “한국 피겨를 위해 할 일이 있다”는 김연아의 말대로 ‘피겨여왕’으로서 남은 역할을 해냈다. 후배들과 함께 한 소치 올림픽. 마지막 무대였지만 메달에 연연하지 않았던 김연아는 진정한 ‘피겨여왕’의 모습이었다.
김연아의 몸은 종합병원이다. 허리, 고관절, 발목 등 세기도 힘들다. 한 방향으로만 도는 점프에 척추는 휘었고, 숱한 착지로 발목은 하이힐조차 신을 수 없는 상태다.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한 식단 조절, 쉴 틈 없는 훈련까지. 김연아의 17년은 절제, 그 자체였다. 김연아도 “후련함이 앞선다. 무엇을 하고 싶다기보다 경기에 대한 걱정, 훈련에 대한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시원할 것”이라고 털어놨다.
드디어 김연아의 마지막 무대가 끝났다. 이제 김연아는 남들은 일찍부터 누렸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팬들은 섭섭하겠지만, 김연아는 마지막 프리스케이팅 ‘아디오스 노니노’와 함께 ‘여왕’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이제는 ‘여왕’을 보내줄 때다.
‘아디오스(안녕) 김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