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하게 가라앉은 가운데 재판장의 입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법정에서는 정적을 깨는 박수와 함께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사건이 일어난 지 23년 만의 무죄 판결이었다.
13일 오후 2시 서울고법 505호 법정에서는 1991년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돼 옥살이를 했던 강기훈 씨의 재심 선고공판이 열렸다.
숱한 관심을 반영하듯 법정 주변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간암 투병 중으로 알려진 강 씨는 수척한 모습으로 검은색 폴라 상의와 회색 정장 차림으로 이날 피고인석에 올랐다.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는 30분여간 그는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이었다. 무죄가 선고된 순간에도 그는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판결 선고 직후 서울고법에서 이뤄진 기자회견에서 강 씨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분들의 위로와 격려를 잊지 않고 있다"며 "당사자와 똑같이 괴로워하고 아파한 이 분들의 아픔이 오늘의 판결로 조금이라도 풀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담당하던 강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날 법정에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김성근 목사와 함세웅 신부 등도 법정을 찾아 기쁨을 표현했다.
김성근 목사는 "이 기쁨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정말 기쁘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또 함세웅 신부는 "23년간 무죄를 위해 목숨을 걸어 온 강기훈 형제는 한반도의 찢겨진 삶을 상징한다"며 "오늘의 판결로 사법부가 조금이나마 속죄의 속내를 내비쳤다고 생각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날 법정 안팎에서 강 씨를 응원한 시민단체인 '강기훈의 쾌유와 진실규명을 위한 시민모임' 소속 회원들은 선고 결과를 환영했다.
김선택 집행위원장은 "강기훈 유서날조 사건은 국가권력이 정의롭지 못한 폭력을 휘두를 때 국민 개개인에게 어떤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라며 검찰이 판결을 받아들이고 상고를 포기할 것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