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특성상 선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구설수를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권력이 개입된 사건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 좀처럼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와대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고, 채동욱 개인정보 유출 사건의 핵심 용의자들인 조이제 서초구 행정지원국장과 조오영 청와대 행정관의 영장청구는 기각됐다.
한때 1심의 실형 선고가 이어지며 재벌 회장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분위기도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영장청구 기각과 김승연·구자원 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등이 잇따르면서 흐지부지되는 모양새다.
◈ 대법의 파기환송, 김승연 집행유예 위한 포석?
11일 있었던 한화 김승연 회장 파기환송심 선고결과는 이런 흐름과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5부(김기정 부장판사)는 횡령·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김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0억원을 선고했다.
김 회장이 법원에 배임액에 해당하는 금액을 공탁해 피해변제를 모두 마쳤다는 점,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은데다 부동산 감정평가액 재산정 결과 부동산 배임액이 줄어든 점 등을 양형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당장 환송심 재판부의 판단이 법원의 양형기준과도 배치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대법원 양형기준은 횡령 및 배임액이 300억원 이상일 때는 감경 요소를 감안한다 해도 징역 4~7년을 선고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논란이 확산되자 법원은 김 회장의 경우는 과거 폭행사건으로 처벌 받은 전력 때문에 형법37조의 '후단 경합범'에 해당돼 양형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적극 해명했다. 법리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법리 문제와 별도로 배임액 산정 수정만으로 '징역4년의 중형'이 '집행유예'로 한순간에 뒤집어지는 것이 정당한가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대법원이 김 회장의 상고심을 파기환송한 이유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법률심인 대법원은 하급심의 양형부당과 관련해서는 상고를 받아들이지도, 판단하지도 않도록 돼있다.
1심에서 실형을 받은 김 회장이 2심에서 형이 감경됐지만 여전히 실형이 유지되자 실형이 확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왔던 이유였다.
하지만 지난해 9월 대법원은 "배임액 산정에 문제가 있다"는 흔치않은 이유로 원심 판단 일부를 파기해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한 법조계 인사는 "기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배임액 산정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유죄가 확실해 보이는 사건을 파기환송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김 회장이 유죄가 확정되면서도 구사일생으로 실형을 면하게 된 데에는 대법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셈이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김 회장에 대한 양형이 과도하다는 대법원의 의중을 충실히 반영한 선고 결과"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대법원이 김승연 회장 집행유예를 위해 포석을 깔아준 셈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김 회장 사건에 앞서 지난 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가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 축소 은폐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을 둘러싼 논란은 시간이 지남에도 더욱 증폭되는 분위기다.
재판부는 사실상 피의자인 국정원 여직원이 결정적 물증인 노트북과 데스크톱의 분석범위를 제한해달라고 요청하자 "분석요원이 자신의 판단으로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김 전 청장측의 주장을 '달리 의심할 이유가 없다'며 전폭 수용했다.
오히려 "김 전 청장은 분석 전 과정을 영상녹화하고 분석과정에 선관위 직원 및 수서서 직원을 참여시키는 등 투명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조치를 마련한 사실이 인정되다"며 두둔하는 듯한 표현도 판결문에 담았다.
채동욱 개인정보 유출 사건의 핵심 용의자들인 조이제 서초구 행정지원국장과 조오영 청와대 행정관의 영장청구 기각 결정도 납득하기 힘들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법원은 "혐의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며 영장기각 사유를 밝혔지만 검찰은 "조 행정관 등이 말을 계속 해서 바꾸는 상황에서 혐의 소명에 필요하기 때문에 영장청구를 한 것"이라며 답답해했다.
결국 이 사건은 수사에 착수한지 몇 개월이 지나도록 좀처럼 진전하지 못한 채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을 둘러싼 각종 법원의 판단들이 공교롭게도 현 정부가 가장 바라던 상황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 '정권 눈치보기' 법원 고질병 다시 도지나?
김용판 무죄와 관련해 박주민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는 정치권력의 압력과 인사에 대한 판사들의 욕구가 함께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박 변호사는 "서울지방법원장이 감사원장으로 가는 모습 등을 보면서 판사들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정치적인 압력을 정부가 행사하는데 법원이 독립됐다고 해도 그런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근 법원의 재벌들에 대한 잇딴 유화적 판결도 정권과의 '코드맞추기'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 기간동안 법정에 선 김승연, 구자원 최태원 회장 등은 모두 지난해 하급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시기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슬로건을 본격적으로 폐기하기 직전이었다.
경실련 경제정책팀의 이기웅 부장은 "작년 하반기부터 청와대가 박근혜 대통령을 중심으로 (경제민주화와 관련한) 국정기조 전환을 노골적으로 내세우면서, 사법부가 청와대 눈치보기 식으로 재판결과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런 현상에 대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상당하다.
박근형 참여연대 처장은 "최근 논란의 판결은 법관 개개인의 인식이 우리 국민들의 인식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며 "결과가 누구에게 유·불리하다 해서 의도가 있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