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검찰과 변호인 측 주장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배심원으로 참여한 시민들은 두 사건 모두에 무죄 평결을 내렸다.
하지만 두 재판의 판사는 각각 나꼼수 사건은 무죄, 안도현 사건은 유죄를 선고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2008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국민참여재판이란 주권자인 국민이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해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고 이를 법관에게 권고해 판결하게 하는 민주적 재판을 말한다. 즉 법관만이 재판을 담당한 종래의 재판은 국민의 상식과 동떨어진 독단적 판결을 낳을 수 있으므로 국민의 건전한 상식을 재판에 도입하여 민주성을 확보하기 위해 새롭게 만든 민주적 제도가 국민참여재판이다.'
신간 '국민참여재판 이대로 좋은가?'(박홍규·알마)의 책머리에 실린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설명이다. 이 책은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고 주권자인 국가제도를 말한다. 주권에서 나오는 정부인 행정부와 입법부는 물론 사법부도 국민의 종복이고 하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참여재판이 생겨났다. (9쪽)'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민주재판의 원리에 걸맞은 새로운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모색이 절실한 때라고 강조한다.
진보적 법학자인 지은이는 현행 국민참여재판의 커다란 문제점으로 '배심재판 수가 지극히 적고' '배심원의 평결이 권고적 효력에 그치고 있으며' '무죄율이 일반재판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고' '무죄판결에 대해 검찰이 항소할 수 있다'는 네 가지를 꼽는다.
'이는 모두 관련 이익집단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타협한 결과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네 가지 문제점 중에서 국민참여재판의 무죄율이 일반재판에서보다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 검찰을 비롯한 기득권 보수세력에게는 가장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중략) 이처럼 전반적으로 보아 지금의 국민참여재판은 국민보다도 법조계, 특히 검찰 측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3년 6월까지 억울한 옥살이는 약 8만 건으로,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의 수사와 재판은 문제투성이다. (16, 17쪽)'
이 책은 한국의 재판을 민주재판에 반하는 '관료재판' '독재재판'이라고 명명한다. 검찰관이나 법관의 경우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시험에 합격했으니 현명하고 정직하며 아무런 문제점도 없다는, 지극히 잘못된 신비주의적 믿음에 기댄 탓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설명이다.
이는 진정한 사법 민주화가 이뤄지려면, 법과 판검사가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 일하는 종복이라는 민주재판의 원리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절실하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한국의 사법부는 일제 이후 그 체질을 거의 그대로 유지해 왔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그 어떤 조직보다도 비민주적이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법원은 일본의 그것과 달리 총독부의 일개 관청으로서 아무런 독립성을 보장받지 못했다. 그러한 법원의 서기 등을 역임한 일제 말단 주구들이 해방 후 법원의 주역이 됨에 따라 한국의 법원은 시작부터 비민주적인 체질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승만 독재와 군사정권의 독재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91, 92쪽)'
이 책은 국민참여재판을 민주재판으로 바로 세우려면 시민 배심원의 평결이 바로 선고 판결이 되도록 하고, 그 결과에 대해 판검사가 군말 없이 승복하고, 대상 사건을 모든 민형사사건으로 확대하고, 무죄율을 더욱 높이는 등의 근본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형사재판에서는 무죄추정원칙에 의해 모든 피고인이 동등하게 합리적 의심을 넘어 유죄로 증명되기까지는 무죄로 추정되므로 검찰이 입증에 실패했다(곧 합리적 의심이 남는다)는 의미에서 무죄와, 유죄라고 말할 수 없다를 구별할 수 없고 둘은 같은 것이 된다. 배심제판에서도 배심원이 맡은 역할은 검찰의 입증에 합리적 의심이 있는가 없는가를 가리는 것이지, 진범인가 아닌가를 가리는 것이 아니다. (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