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CBS는 2014년 신년기획으로 모두 3회에 걸쳐 광양만 매립 과정과 현재의 모습을 돌아보는 연속기획 ‘광양만 매립 30년’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광양만 뻘밭에 모래기둥 심어 제철소를 짓다
2. 광양만 13개 섬, 매립됐지만 흔적은 남았다
3. 광양만 매립 30년 압축적 성장과 오늘
“여기가 학교 옛터인데, 정문 소나무가 아직 이렇게 있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전남 광양만 매립으로 실향민이 된 박선호(67) 씨는 매립부지 내 주택단지에서 백운대로 오르는 산책로 한 편의 나무 한 그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폐교가 된 금도국민학교 정문 소나무
박 씨에 따르면 당시 학교 운동장에 심어져 있던 플라타나스 나무 4그루도 아직까지 상하지 않았다. 저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높이 솟아 있었다.
30여 년 전 이곳 금호도에는 도촌, 내동, 대동, 양도에 300여 세대가 살았다. 1872년(고종 9년)에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 금호도 지역을 문헌상 최초로 ‘금도(金島)’라고 표기했다. 1947년 설립 당시 옛 지명을 본뜬 금도국민학교는 4개 부락 중 대동에 위치해 있었다. 1984년 폐교 당시 학생수는 8학급 310명.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나무가 금도국민학교 정문을 지킨 소나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주민들의 기억 속에만 있다.
◈ 기이하고 웅장한 내동부락 당산나무
과거 내동부락은 지금 광양제철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가 들어선 학교단지로 바뀌었다. 초등학교 뒷산에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산 중턱에 딱 보아도 범상치 않은 팽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맞은 편 길에 놓인 벤치에 앉아 나무를 올려다보면 수천갈래로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갈기갈기 찢어진 듯 보여 장관이다.
이주민들은 “여름에는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식혔고, 아이들은 나무를 놀이터 삼아 오르락내리락 하며 놀았다”고 말했다.
옛 추억이 아쉬운 듯 돌아내려오는 모퉁이에는 이주민들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석조건물의 흔적이 흙더미와 낙엽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 광양제철소 공장 내 ‘서취도’ 윗머리
광양제철소 공장부지 안에도 매립의 흔적은 있다.
제철소 건설을 위해 바다를 매립하는 과정에서 13개 섬 가운데 11개 섬이 하나둘 사라졌다. 사라진 섬에서 나온 돌과 모래로 바다를 메웠기 때문에 ‘묻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서취도는 그 모습이 나발모양을 하고 있어 ‘나발섬’으로도 불렸다. 또 썰물일 때는 하나의 섬이었다가 밀물이 들어오면 둘로 나뉘어져 그중 작은 것을 ‘소서취도’로 부르며 이것도 함께 보존돼 있다.
현재 광양만 매립부지의 이전 흔적들은 대부분 방치돼 있다.
금도국민학교 정문 소나무와 내동부락 당산나무는 몇 안 되는 매립 흔적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표지석이나 안내판도 없다. 당산나무 인근에 있는 석조건물 흔적도 볼썽사납게 방치돼 있다.
당산나무는 장석영 광양시의원이 지난해 광양시에 보호수 지정을 건의했다. 현행법으로는 역사적 사료나 전설이 담긴 나무, 모양이 기이한 나무 등은 시의 제량과 판단으로 보호수 지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광양시는 ‘기준 규격에 맞지 않는다’, ‘여러 갈래로 돼 있어 보존가치가 떨어진다’는 등의 이유로 지정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재 매립부지 안에는 보호수가 한 그루도 없다.
광양시 행정의 무관심 속에서도 광양만 매립의 흔적들은 30년째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