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부와 의원들 간 온도차
26일 새누리당 관계자들에 따르면 정면돌파론이 당내에서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다. 대국민 사과를 통해 국민의 이해를 구한 뒤 상향식 공천제 도입을 비롯한 대안을 추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지도부는 둔감하다.
원내 핵심관계자는 "경위가 어떻든 이번 사안에 대해 당 지도부가 사과하는 게 맞다는 게 내 개인적 생각"이라고 말했다. 다른 의원은 "우선 대국민 사과를 솔직하게 하고 우리 당이 마련한 대안을 추진해나가는 방식으로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며 "사과의 주체는 당대표여야 한다"고 밝혔다. 다른 의원은 "지방자치의 한쪽 단면만 보고 만든 성급한 공약이었다는 점에 대해 아무래도 당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대국민 사과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국회 정치개혁특위 간사인 김학용 의원 역시 지난 22일 의원총회 뒤에 "국민들께 솔직히 얘기하면 이해해 주실 것이다. 당에서 사과도 할 필요성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반면 당 지도부 차원에서는 대국민 사과 관련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 당직자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지금까지 전혀 논의가 없었다. 야당의 공세에 반격만 하면서 정쟁 이미지를 고착시키고 있어 답답하다"고 한탄했다. 지도부가 대국민 사과에 소극적인 데에는 '야당의 추가공세 빌미를 준다'는 이해타산이 작용하고 있다. 일부 최고위원이 '공약대로 공천제를 없애자'는 원칙론을 고수하면서 지도부 차원의 사과 논의를 지연시키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정치개혁 공약의 이행은
기초선거 공천폐지는 '정치쇄신' 공약들 중 하나로 '박근혜 공약집'에 포함돼 있다. 다른 정치쇄신 공약에는 '부정부패'로 재·보선 발생시 원인제공자가 선거비용 부담, 국회의원 후보 여야 동시 국민참여경선 법제화, 공천 금품수수에 30배 이상 과태료 부과, 국회의원 면책특권 제한 및 불체포특권 폐지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관련법 개정안이 발의된 것은 거의 없다. 따라서 공약 이행실적도 없는 실정이다. '여야 동시 국민참여경선'과 관련해서만 김태원·김재원 의원이 각각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이 역시 소관 상임위에 계류된 채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
'국회의원 면책특권·불체포특권' 공약의 경우는 법률이 아닌 헌법을 바꿔야 공약 이행이 가능하다.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은 대한민국헌법 45조와 44조에 규정돼 있다. 그러나 최근 박 대통령이 '블랙홀'을 거론하면서 개헌에 부정적 입장을 밝힌 만큼, 이 공약도 포기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공약집에 담기진 않았지만 박 대통령은 대선 한달 전, "집권 후 4년 중임제 등에 대한 논의를 거쳐 개헌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블랙홀' 발언은 이 구두공약의 폐기도 공식화한 셈이 됐다.
이에 앞서서는 '4대 중증질환 의료비 전액보장' 공약과 '0~5세 보육 국가완전책임' 공약이 대폭 축소됐고, '2014년부터 반값 등록금 시행' 공약은 한해 미뤄졌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 기초연금 지급' 공약은 대상자 70%에게만 차등지급하는 것으로 후퇴했다.
'전통적 지지층'을 겨냥한 기초연금 공약만큼은 새누리당이나 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가 집중됐지만, 다른 후퇴 공약에서는 대국민 사과가 거의 없었다.
◈"대통령이 직접 사과해야"
기초선거 공천 문제를 놓고 새누리당은 반대파인 폐지론자 뿐 아니라, 같은 입장인 존치론자로부터도 공격을 받는 '기막힌' 처지에 놓였다. 대외적으로 공천폐지론을 주장하는 민주당으로부터는 '대선 공약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천제 유지론을 펴는 정의당으로부터는 '애초에 그릇된 공약을 내세웠다'는 이유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는 지난 21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새누리당은 지금이라도 대국민 사과를 하고, 기초선거 관련 공약파기 시도를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정의당 원내대표인 심상정 의원은 최근 정개특위 소위에서 "정정당당하게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잘못을 말씀드리고 사과하는 게 옳다"고 비판했다.
학계나 시민사회도 정의당과 유사한 입장이다. 부작용을 검토조차 하지 않은 채 공천폐지 공약을 내건 행위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아울러 사과의 주체는 박 대통령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임혁백 교수는 "대선 공약이란 게 어차피 포퓰리즘적 성격이 있고, 이후 상황 변화를 감안해야 한다는 점에서 100% 다 지킬 수는 없다"며 "하지만 공약을 못 지키게 되는 경우 공약의 당사자인 대통령이 당연히 사과해야 한다. 그 다음에 모두가 다 용인할 만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박 대통령의 경우 '국민과의 약속을 중시한다'는 발언이 수없이 녹화·녹음돼 있을 텐데, 그 말을 믿고 뽑아준 국민에게 사과를 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지적했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손호철 교수는 "대규모 예산이 소요되는 복지공약도 아닌데, 정치인의 기득권 내려놓기 차원의 개혁 공약을 내팽개치는 것은 악질적"이라며 "애초에 잘못된 공약을 내놨든, 올바른 공약임에도 정략적 판단에 따라 폐기하는 것이든 대국민 사과가 있어야 한다. 대선공약이었던 만큼 사과 주체는 박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손 교수는 '여야가 함께 대국민 사과를 하자'는 새누리당 일각의 주장에 대해 "입장을 뒤집은 것은 야당이 아닌 여당이다. 여야 동반 사과가 필요하다면 국민이 민주당에 요구하면 될 뿐, 여당이 야당에게 강요할 이유는 없다"고 꼬집었다.
참여연대 안진걸 협동사무처장은 "박근혜 정부도 새누리당도 총선·대선 때 한 경제민주화 공약이나 복지 공약 등을 너무나 헌신짝 버리듯 한다"며 "기초선거 정당공천은 필요한 제도임에도 시민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렇게나 밀어붙이더니, 이제는 불리할 것 같으니까 뒤집는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래서야 6·4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공약의 진정성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겠느냐. 이런 행태야말로 정치를 희화화하는 일이고 국민의 저항을 초래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