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시대는 갔다. 초인의 시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슈퍼맨은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동굴에서 만났던 초인, 니체의 자라투스트라, 이육사가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던 초인이 없다는 얘기다. 삶과 철학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대중문화에서도 더 이상 영웅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20세기가 대중문화의 뿌리가 생기고, 튼튼한 줄기가 만들어진 시기라면 21세기는 화려한 꽃이 피는 시기다. 이런 21세기를 관통하고 있는 법칙은 집단성이다. 20세기 대중문화를 소수 빅스타가 주도했다면 지금은 다양한 개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모습은 미국 팝 음악 시장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로 이어지던 빅스타의 시대는 마이클 잭슨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도 다르지 않다. 배호, 나훈아, 조용필로 이어지던 빅스타는 서태지를 끝으로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런 면에서 '한류'는 21세기 대중문화의 새로운 법칙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있다. 해외에서 자주 열리는 K-팝 페스티벌을 보자. 이 페스티벌의 무기는 특정 개인이나 그룹이 아닌 'K-팝의 집단성'이다.
끊임없이 히트작이 나오는 한류 드라마의 힘 역시 특정 작가와 배우가 아니라 드라마 자체에서 나온다. 이런 집단성은 한류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최근 인기를 끄는 드라마에도 '집단의 힘'이 숨어 있다. 2013년 최고 인기 드라마로 꼽히는 '응답하라 1994'는 작가 한명이 집필한 게 아니라 '집단창작'이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심지어 대본에는 상황만 주어지고 세부대사는 현장에서 배우와 제작진이 논의해 만들었다고 한다. 전문 드라마 작가가 아니어도 최고의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는 시대라는 얘기다.
124명과 42개의 팀. 124명은 공중파 3사의 연말 수상식 수상자 숫자다. 42개 팀은 장장 5시간에 걸쳐 진행된 MBC 가요대제전 출연팀의 수다. 연말마다 열리는 공중파 3사의 연예ㆍ연기ㆍ가요대상이 받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비판은 상의 남발이다. 그 결과 연말 수상식의 권위는 떨어지고 있다. 미국의 아카데미ㆍ에미상ㆍ그래미상의 권위와 비교하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해되는 일이기도 하다. 다수의 스타가 이끌어 가는 지금의 대중문화는 더 이상 소수의 빅스타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서다.
창작자들의 합이 콘텐트 만들어
국내 문화콘텐트의 눈부신 발전 뒤에는 수많은 콘텐트 창작자들의 '합合'이 있다. 개성이 있는 개체에 대한 인정과 융합과 그들간의 시너지 효과가 '한류'의 원동력이다. 이제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1%의 천재가 99%의 평범한 사람을 이끈다는 편견과 소수의 대기업이 국가 경제를 책임진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최고는 아닐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다수의 합이 보다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어야 할 때다.
류준호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연구교수 junhoyoo@han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