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대한민국 헌법(9차 개정헌법)은 1987년 9월18일 여야 의원 260명에 의해 발의돼, 국회 본회의와 국민투표를 거쳐 이듬해 2월25일 발효됐다. '87년 헌법'에 따른 27년간의 우리 헌정체제는 '87년 체제'로 규정된다.
'2000년대의 새 역사 창조'를 내세운 87년 헌법이지만, 그동안 정치권 안팎에서는 개헌론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시대 변화 반영의 필요성과 87년 헌법 자체의 결함 탓이었다.
◈87년 헌법의 의의◈
87년 헌법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 헌법에서 독재 용인적 요소를 파기해 민주 정치의 실현을 보장했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게 해 정권의 '체육관 선거'를 원천봉쇄한 것이다. 국회의 국정감사권, 헌법재판소의 기능이 부활되는 등 입법부·사법부의 권한도 강화됐다. 평화통일 정책 추진, 최저임금제 도입, 모성보호 등의 규정도 신설되면서 통일·노동복지의 의무가 국가에 부여됐다.
87년 헌법은 헌정 사상 최초로 여야 합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승만 정권 때 발췌개헌·사사오입개헌이나 박정희 정권 때 삼선개헌·유신개헌 등 대부분 야당을 배제한 채 강행된 이전 개헌과 다르다. 이 덕에 사사오입헌법(5년7개월), 유신헌법(7년10개월), 전두환 정권의 5공화국 헌법(7년4개월) 등과 달리 무려 27년이나 '장수'했다.
87년 헌법은 '6월 민주항쟁'의 성과물이기도 하다. 그해 1월 자행된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은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고, 전두환 정권은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받아들이며 항복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서울올림픽이라는 국가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소모적 개헌논의를 지양한다"고 4·13 호헌(護憲)조치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 도입을 통해 장기 독재의 종식, 수평적 정권교체의 보장,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을 이뤘다는 게 87년 헌법의 가장 큰 의의다. 그런데 이 부분이 거꾸로 한계로 작용한다는 지적이 계속됐다.
◈내용적 한계◈
현행 5년단임 대통령제의 문제로는 '제왕적 대통령'이란 표현대로 과도한 권력이 대통령에 집중되는 것이 가장 먼저 꼽힌다.
대통령에게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이란 지위를 동시에 부여해 국가권력이 대통령 한 사람에게 쏠리고, 이 탓에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정치투쟁이 야기된다는 점이다. 이는 다시 각 정당의 지역주의 패권정치를 공고화하면서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단임제가 야기하는 '책임정치 부실' 문제도 수차례 지적돼왔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14일 CBS와의 통화에서 4년 중임제를 고려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5년 단임제는 특정세력의 장기집권을 막자는 취지에서 도입됐고, 제도로써 충분히 자리를 잡았다"며 "그러나 초기 1년간은 정권 세팅으로, 후기 1년간은 레임덕으로 시간을 허비하면서 실제 대통령이 일할 기간은 3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의 개헌론도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최근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은 "새해 화두는 정치개혁"이라며 개헌론을 폈다. '개헌 전도사'로 통하는 그는 '4년 중임제'의 개헌안을 자체적으로 마련한 상태다.
지난해 국회 대정부질문 때 이 의원은 "전 세계 대통령제 실시국가 90곳 가운데 80곳이 1인당 GDP가 1만달러 이하이고, 국가청렴도 20위 이내 나라 중에는 단 한 곳만 대통령제"라며 "권력이 집중되는 나라는 대개 못살거나 부패한 나라"라고 말했다.
87년 개헌 협상 과정의 정략적 접근도 지적되고 있다. 당시 여야는 각각 4명씩 현역 의원 8명으로 '8인 정치회담'을 벌여 첫 회동으로부터 고작 한달만인 87년 8월 31일 개헌 합의안을 도출했다.
단기간에 130조에 달하는 새 헌법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에 한해 협상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헌정에서 국가의 지향점과 토대를 확인하고 마련하는 데 상대적으로 부실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야당인 통일민주당 의원 신분으로 8인 정치회담에 참여했던 이용희 전 국회부의장은 이같은 한계를 인정했다. 그는 "대통령 5년 단임제라는 게 현재 문제라는 데 동의한다. 개헌을 통해 보완해야 한다"며 "당시 상황으로는 민주화 투쟁으로 오랜 세월 고생한 양김씨(김영삼·김대중)가 한번씩은 대통령을 하시게끔 하자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결국 87년 당시 60세 이상 '고령'이던 야당의 두 대권후보가 '생전에 대통령을 할 수 있도록' 5년 단임제를 도입했다는 얘기다. 이들은 개헌 뒤 첫 대선에서 나란히 낙선했으나, 결국 차례로 청와대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대통령제 국가 대다수가 채택하고 있는 대선 결선투표제는 8인 회담에서 논의조차 안됐다. 이 덕분에 노태우(득표율 36.60%), 김영삼(42.00%), 김대중(40.30%) 전 대통령을 비롯해 개헌 이후 5명의 대통령이 과반 미달 득표율로도 국가원수가 될 수 있었다.
학계에서 87년 헌법을 두고 '국민의 이익과 무관한 엘리트들간의 타협', '각 정파의 집권가능성을 모두 만족시킬 정략적 담합의 산물'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임혁백 교수는 "87년 헌법을 민주화 투쟁에 따른 성과로 보기에는 주요 투쟁 주체인 학생·민중의 입장에서 미흡한 면이 있다.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 타협을 했고, 그들에게 경쟁자 지위를 인정했다"며 "또 협상 과정에서 민중의 참여가 완전히 배제되면서 실질적인 민주화 의제가 소홀히 다뤄졌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