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우석 감독 "'변호인'은 사이렌…행동은 관객 몫"

[노컷인터뷰] "피곤에 찌든 시대 이해와 성찰 계기됐으면"

양우석 감독(노컷뉴스 이명진 기자)
영화 '변호인'이 세대를 아우르는 흥행 몰이를 하면서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한 양우석(45) 감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크다.

하지만 그는 언론과 일절 접촉하지 않았다. 그를 아는 이들을 통해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MBC프로덕션의 영화 프로듀서 등을 거쳐 작가로 활동하면서 주로 애니메이션·웹툰 작업을 해 왔다는 점이 알려진 정도다.


변호인이 개봉할 즈음 만난 배우 송강호는 양 감독에 대해 "말은 별로 없지만 선량하고 예의 바른, 겉보기와는 다른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변호인을 제작한 최재원 위더스필름㈜ 대표는 "대학 2년 후배인 그가 뛰어난 작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변호인이 첫 연출작임에도 감독으로서 빠르게 성장하는 스펀지 같았다"고 평했다.

그런 그가 영화 개봉 한 달이 돼 가는 시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9일 저녁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양 감독에게 '왜 이제서야 나섰냐'고 물었다.
 
"안타깝게도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어떤 사안에 대한 문맥이나 행간을 이해하기 보다는, 문장 또는 단어 몇 개를 뽑아내 진영논리로 접근하는 양상이 심해졌다는 생각을 했어요. 개봉 전부터 영화의 모티브가 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지뢰밭에 들어서는 심정이었습니다. 제가 나섰을 때 더 나쁜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다분했죠. 가급적이면 영화로 다가갔으면 싶었어요. 눈부신 활약을 보여 주신 배우들이 관객과 먼저 만나는 것이 도리라고도 생각했고요. 일방적으로 피하면 또 다른 오해를 부를 것 같아 나섰습니다. 관객분들에게 '너무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었어요."
 
양 감독은 애초 변호인의 이야기를 웹툰으로 먼저 소개할 생각이었단다. 그러다 최재원 대표를 만났을 때 우연히 이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고 "영화로 해 보자"는 최 대표의 제안에 영화화가 진행됐다.
 
"사실 제 입장에서 '영화는 노 전 대통령 사후 10년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 했는데, 젊은이들이 주로 보는 웹툰보다는 관객 범위가 더 넓은 영화로 못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나리오를 쓰고는 좋은 감독님이 나타나서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 주기를 바랐는데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직접 연출을 하게 됐고, 독립영화 형태로 하자는 논의를 하다가 송강호 선배가 합류하시면서 규모 있는 상업 영화가 됐죠."
 
첫 연출작이라는 데 부담도 컸으리라.

"제 스스로도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대단한 배우들을 만난 게 행운이었죠. 그분들의 좋은 연기를 캐치하기만 하면 됐으니, 어떤 연기가 좋고 나쁜지에 대한 기준만 정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도와 줄테니, 당신은 처음에 생각했던 이야기에 집중하라'고 말해 준 배우, 스태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편집 과정은 글 쓰는 과정과 비슷해서 오히려 익숙하고 수월했어요. 지금까지 해 온 일이 영화랑 멀지 않았고, 시나리오를 스물다섯 번 정도 고쳐 쓰면서 극의 흐름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니까요."
 
양우석 감독(노컷뉴스 이명진 기자)
그는 스스로 "뭔가 궁금하면 이해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했다. 호기심을 풀기 전에는 잠도 못 잘 정도란다.

현대사에 관심이 많던 양 감독은 그 시대를 살면서 고민했던 인물들에 주목하는 것이 이에 대한 호기심을 풀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1980, 90년대 한국사를 관통하는 인물로 노 전 대통령을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88년 5공 청문회 때 초선 의원이던 노 전 대통령을 보면서 춘향전의 이몽룡을 떠올렸죠. 당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해도 40% 정도만 붙는다는 사법시험에 고졸로 합격한 인물이 암행어사처럼 5공 인사들을 혼내는데, 속이 시원한 겁니다. 그는 1980년대 법조인으로서 인권과 민주화를 외쳤고, 정치인이 된 뒤에는 동서화합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지닌 인물로 다가왔어요. 그때 그는 국민적 스타였으니 저 역시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죠."
 
일찌감치 '인간 노무현'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해 온 양 감독은 노 전 대통령이 2002년 대선 후보가 되고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그 이야기를 용도폐기했다. 그때만 해도 용비어천가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된 까닭이다.

하지만 10여 년 뒤 청년 세대를 보면서 그의 생각은 달라졌다.
 
"학생들이 너무 피곤해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죠. 인생에서 취직 문제가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된 시대에서 10대 때부터 학원에 다니고, 스펙 쌓는 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을 나온 88만 원 세대. '우리가 젊은이들을 왜 이러한 상황에 몰아넣었을까'라는 자책을 하다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모순이 많았던 1980년대를 들여다봄으로써 현재의 사회적 조건을 다시 세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양 감독은 영화 변호인을 통해 "이해와 성찰의 가치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모든 인간은 삶의 밀도가 굉장히 높은 시기를 거치는데, 이때 시대와 자신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있어야만 획기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다윈이 갈라파고스제도에 머문 짧은 기간 진화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진화론을 발전시켰듯이 말이다.

그는 극중 변호사 송우석(송강호)과 차동영 경감(곽도원)을 대비시킴으로써 그 가치를 더욱 부각시키려 했다고 설명했다.
 
"극 초반 송우석은 돈을 좇고 차동영은 애국을 부르짖는다는 점에서 둘 다 나름의 신념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석은 부조리한 사건을 접한 뒤 밤새 책을 읽는 등 자신이 변호할 학생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자신을 성찰합니다. 반면 차동영은 해방과 분단, 6·25 전쟁 등 한민족의 비극정 상황이 낳은 비뚤어진 신념을 맹목적으로 따르죠. 이 점에서 변호인의 엔딩 시퀀스는 이해와 성찰을 통해 우석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죠."

양 감독은 영화를 접한 관객들의 호응이 놀랍고, 무엇보다 이야기의 본질이 관객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듯해 기쁘다고 했다.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정신 없었는데 지금도 얼떨떨합니다. 작가는 사이렌처럼 사람들이 일단 멈추고, 주위를 살펴보게 만드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행동은 사이렌을 들은 이들의 몫이겠죠. 영화 변호인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다만 관객분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줄 수는 있을 겁니다. 문맥과 행간을 읽으려는 노력을 통해 행동이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 실천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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