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시장을 살리기 위해 미국 정부는 돈을 쏟아 부었다. '경기가 침체되면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겠다'는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공언 그대로였다. 리스크가 있는 선택이었다. 채권을 찍어 빌린 돈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공산이 적지 않았다. 관건은 시장의 부활이었다. 빌린 돈을 투입해도 시장이 살아나지 않으면 말 그대로 '끝장'이었다.
시장에 돈을 뿌린 지 5년. '운명의 여신'이 미 정부에 미소를 보낸다. '돈의 효과'가 미국시장에서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013년 3분기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4.1%(연율기준)를 기록했다. 시장예상치를 0.5%포인트 넘어서는 수치다. 2분기보단 1.6%포인트가량 상승했다. 2011년 4분기 이후 2년 만의 최대 상승폭이다.
주목할 대목은 3분기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린 주역이 '개인소비지출'이라는 점이다. 미국 GDP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가계소비증가율은 시장예상치 1.4%보다 0.6%포인트 높은 2.0%를 기록했다. 민간시장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는 방증이다.
미국 제조업(ISM)지수와 고용지표는 더 고무적이다. 2013년 10월 ISM지수는 9월보다 0.9포인트 오른 57.3을 찍었다. 블룸버그의 예상치 55.1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로, 6개월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11월 실업률(7.0%) 역시 5년 만에 최저수준으로 내려앉았다. ISM지수가 개선되고, 실업률이 낮아지면 민간소비지출은 더 늘어난다. '정부돈'이라는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던 시장에 활력이 감돌 수 있다는 얘기다.
2013년 12월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 MC)에서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을 결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빌린 돈을 회수해도 민간시장 스스로 메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다.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2014년 1월부터 월 850억 달러인 양적완화 규모를 750억 달러로 축소한다.
실제로 '저물가 현상'이 글로벌 시장을 덮치고 있다. 유로존의 10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0.7%로, 유럽중앙은행(ECB)의 목표치인 2%에 미치지 못했다. 미국의 11월 소비자물가상승률도 1.2%에 머물렀다. 한국 역시 다르지 않다. 한국은행의 중기(2013~2015년) 물가안정목표는 2.5~3.5%였다. 그러나 한은의 2013년 예상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2% 안팎이다.
문정희 KB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각국 정부가 통화정책을 통해 돈을 시장에 투입했음에도 물가상승압력이 낮은 건 민간대출이 늘지 않고, 임금상승ㆍ비용인상압력이 낮기 때문"이라며 "테이퍼링 시행 이후 점검해야 할 첫째 지표는 물가"라고 말했다. 그렇다. 세계경제에 '저물가 시그널'이 울렸다. 경기침체와는 다른 유형의 공포가 몰려오고 있다. 대비하지 않으면 이번에도 당한다.
이윤찬 기자 chan4877@thesco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