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분권…27년 묵은 '개헌', 과연 이번에는?

국회의장 개헌공론화, 개헌파 국민투표 추진…'블랙홀' 발언 대통령 의중은?

강창희 국회의장
갑오년 새해를 맞은 여의도에 ‘6월 지방선거’ 외에 또다른 대형 이슈가 기다리고 있다. 바로 27년 묵은 숙제인 ‘개헌’이다.

새해 개헌 논의에 불을 당긴 것은 강창희 국회의장이다. 강 의장은 신년사에서 “올해는 대한민국의 더욱 튼튼한 미래를 위해 개헌문제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해야 한다”며 국회의장 직속 ‘헌법자문위원회’ 발족을 공식 선언했다.

이미 강 의장은 지난해 7월 제헌절 경축사에서 “개헌의 필요성에 많은 국민이 동의하고 있는 만큼 개헌은 19대 국회에서 마무리 짓는 게 옳다"면서 개헌 공론화의 시점을 새해 초로 못박은 바 있다.

강 의장은 지난 2일 헌법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김철수 전 서울대 법대교수를 내정한 데 이어 이달 중순에는 학자, 전직 정치인·관료, 법조인 등 13명으로 구성되는 헌법자문위를 가동시켜 임기가 끝나는 오는 5월 말까지 헌법 개정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에 여야 의원 116명이 참여하고 있는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개헌의원모임은 당장 이번 주부터 여야 의원들을 상대로 개헌 서명 작업에 착수해 6·4 지방선거에서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로드맵까지 제시한 상태다.

‘개헌전도사’를 자처해 온 비박(비박근혜)계 좌장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달 27일 개헌의원모임 워크숍에서 “당장 편할지는 모르지만 이래 갖고는 나라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며 “권력체계를 나눠야 한다”고 개헌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박근혜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해 4월 여야 6인협의체 회의에서 새누리당 이한구, 민주당 박기춘 당시 원내대표의 제안으로 던져진 불씨가 새해들어 본격적으로 타오를 형국이다,

◈ 87년 9차 개정헌법 27년째 유지…핵심은 ‘분권’

현행 헌법은 민주화운동의 산물이다. 1987년 10월29일 대통령 직선제 및 5년 단임제를 골간으로 9차 개헌을 통해 탄생한 이후 27년째 유지되고 있다. 권력구조가 다원화된 현 시대에 적합지 않다는 개헌 주장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10차가 될 이번 개헌 논의의 초점도 ‘권력분산’에 맞춰지고 있다. 현재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분권형 대통령제’로 바꾸자는 것, 즉 대통령은 통일·외교·국방 등 외치를, 국무총리는 내치에 관한 행정권을 맡아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나눠 책임정치를 수행하자는 것이다.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이나 무리한 정책 추진을 막기 위한 미국식 4년 중임제도 거론되지만 어디까지나 ‘분권형 대통령제’를 기본 전제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민주당 우윤근 의원은 개헌의원모임 워크숍에서 “분권형 개헌은 정치개혁의 알파요 오메가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다수결에 의한 승자독식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폐하고 협의민주주의 형태의 분권형 또는 내각제 개헌이 이뤄져야 한다"며 "이제는 '87년 체제'의 종언을 고해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 좌절의 연속, 17년 개헌 시도

10차 개헌 논의의 시발점은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였다. 김 총재는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1997년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사시켰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어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4년 연임제 ‘원포인트’ 개헌 제안과 2009년·2011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개헌 시도도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18대 국회에서는 김형오 당시 국회의장이 헌법연구자문위원회를 설치하며 개헌론을 주도했지만 결국 흐지부지됐다.

‘분권형 개헌’ 추진이 당시 유력 대선주자였던 박근혜 대통령을 흔들려는 의도로 받아들여진데다 총선과 대선이 다가오면서 여야의 이해관계가 충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소멸된 것 같았던 개헌론은 2012년 대선정국에서 여야 대선후보들의 공통 공약으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개헌에 반대했던 박 대통령도 대선후보로 확정되자 '4년 중임제 및 국민의 기본권 강화를 골자로 하는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요지의 공약을 내놓았다.

하지만 박 대통령도 대선기간에는 개헌을 내세우다가 집권 이후에는 의지가 약해지는 역대 정권의 모습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4월 "민생이 어렵고 남북관계도 불안한 상황에서 개헌 논의를 하면 블랙홀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부정적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9차 본회의에서 취임 후 첫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송은석기자
◈ 관건은 대통령의 결단

개헌의 키는 박 대통령이 쥐고 있다.

개헌안 발의는 헌법상 대통령 외에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150명)가 할 수 있고 재적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헌법 제128조~130조)

하지만, 박 대통령의 당내 영향력을 감안할 때 대통령의 의지가 없다면 개헌은 또다시 물거품이 될 수 밖에 없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은 국회의장의 개헌 공론화 추진에 아직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개헌의 결과는 차기 대통령부터 적용되지만 ‘권력분산’의 내용이 현재 권력에 영향을 주면서레임덕을 앞당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결국 관건은 박 대통령이 ‘분권형 개헌’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털어내고 결단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개헌의원모임 고문인 민주당 유인태 의원은 "(개헌안 발의 요건인) 과반수 돌파가 어려울 것 같지 않은데, 박 대통령의 개헌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임기 초반이 지나 대권 주자들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개헌 시도가 좌초된 것은 역대 정권마다 되풀이딘 현상이다. 이번 정권에서도 올해 국민투표 부의가 불발된다면 개헌 동력은 급격히 쇠약해질 가능성이 크다.

강창의 국회의장은 이와 관련해 “이번에도 말로만 그친다면 개헌의 적기를 놓치게 될 것”이라며 “모든 정파가 초당적으로 참여해서 권력구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 100년을 내다보면서 ‘제2의 제헌’을 하는 각오로 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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