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을 마치고 6개월여의 시간이 흘렀으니 그럴 법도 했다. 웨이브를 준 머리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그는 평소 대중들의 기억 속 배우 공유 그대로였다.
"오며 가며 용의자를 함께 했던 분들을 만날 때마다 '머리가 왜 그렇게 빨리 자라냐' '우리의 동철이는 어디로 갔냐'고들 하죠. (웃음) 작품을 마치면 늘 아쉬움이 컸는데, 이번에는 덜해요. 시원하게 발산한 느낌이랄까. 전작 '도가니'(2011) 때는 끝낸 뒤에도 스스로 가라앉아 있다는 느낌이 꽤 오래 갔죠. 반면 용의자에서는 끊임없이 격한 몸짓으로 감정을 표출한 덕인지 뒤끝이 없는 기분이에요."
그는 "용의자를 단순 액션 영화로 생각했다면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액션 영화를 두고 액션 영화가 아니라니? 흥미롭게도 그 이유를 설명하는 공유에게서 지동철의 흔적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니, 동철에게서 공유라는 사람을 봤다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하다.
"용의자는 남자, 아비와 관련된 본능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로 다가왔어요. 조국이 던져 주는 임무를 로봇처럼 수행해야 했던 인간병기 동철은 조국에게 버림 받고, 유일한 버팀목이던 가족까지 잃으면서 복수가 삶의 이유가 된, 기구한 운명을 지닌 인물이죠. 그 처절함을 말이 아닌 몸짓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데 끌렸어요. 이 점에서 액션이라는 장르를 떠나 그동안 제가 작품을 선택해 온 기준인 '물음을 던지는 영화'에도 부합한다고 봤죠."
이 점에서 공유가 꼽은 영화 용의자의 키워드는 부성애다. 극중 여러 액션 신에 화려함보다는 처절한 생존 본능을 담으려 애쓴 이유도 여기에 있단다.
- 부성애를 나타낸다는 것이 미혼으로서 어렵지는 않았나.
"물론 한계는 있었다. 자라면서 보고 느낀 아버지의 모습을 확장시켜 봤다. 처자식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는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 일들, 그보다 더한 것들도 할 수 있는 존재로 다가오더라. 전작 도가니에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장애우들과 함께 지옥 같은 세상에 맞서는 역할을 했던 것도 훈련이 됐다. 원신연 감독님이 기러기 아빠다.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경험을 공유한 게 큰 도움이 됐다. 그러한 감정을 극중 액션에 녹여내려 애썼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주먹질 좀 하는데' '자세 나오는데'라는 반응을 넘어, 동철의 처절한 몸짓에 조금이라도 공명한다면 성공한 거다."
"늘 그렇다. (웃음) 일 때문에 결혼을 미룬다는 말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인기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늦게 가야 한다는 말에도 개의치 않는다.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임자를 아직 못 만났다.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선택하는 데 있어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배우로서 표현의 범위도 넒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결혼은 항상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 액션 배우 공유의 발견이라는 말들이 나온다.
"배우로서 스펙트럼을 더 넓힐 수 있었다. 원신연 감독님께 공을 돌리고 싶다. 처음에 출연을 거절했을 때 스치는 인연이 됐을 수도 있는데, 감독님이 끝까지 설득하셨다. 촬영 내내 감독님께 '이 영화 찍게 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액션으로 감정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으니 말이다."
- 절벽을 오르고, 자동차로 계단을 질주하고, 한강에서 뛰어내리는 등 위험한 액션신을 직접 소화했는데.
"액션의 강도가 점점 강해지는 만큼 위험에 대한 감각도 무뎌지더라. 스태프들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정작 나는 무덤덤했다. 나중에는 스태프들도 무덤덤해지더라. (웃음) 할리우드 첩보 액션 영화 '본' 시리즈 제작비가 1000억 원대인데, 우리 영화는 70억여 원이 들었다. 제작비 면에서 비교가 안 되지만 뭔가 보여 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게 배우, 스태프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 차와 차가 마주보고 질주하는 '치킨 게임' 신이 인상적이더라.
"정말 위험했던 순간이었다. 동철의 차에는 스턴트맨이,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지프차에는 인형을 태웠다. 두 차가 충돌한 뒤 지프차가 공중으로 붕 떴는데, 높은 데서 아래를 찍던 카메라 바로 앞을 스치더니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멀리 날아가더라. 그런데 그 차가 하필 스태프가 타고 있던 차의 전면 유리를 덮친 거다. 배우, 스태프들 모두 얼굴이 사색이 돼 달려갔는데, 차에 앉아 있던 스태프의 몸 바로 앞까지 유리가 움푹 들어가 있더라. 다행히 그 유리가 깨지지 않아 잔상처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영화 용의자는 좋은 장면 하나 건져보겠다는 일념으로 사선에서 위험을 무릅쓰며 찍은 장면들로 가득하다."
- 지동철을 연기하는 동안 현실에서 재밌는 일도 있었을 텐데.
"너무 몰입했던 탓인지 나중에는 현실과 구분이 잘 안 되기도 했다. 현실에서 차를 운전할 때 괜히 손에 힘이 들어갔고, 누가 쳐다보면 마주 째려보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안 다칠 것 같았다. (웃음) 동철이라는 역할이 본능을 자극하는 게 있었다. 유치하지만 그것에 도취됐던 셈이다. 매니저가 고생 참 많이 했다. (웃음)"
- 엔딩신을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더라.
"어느 시퀀스보다 감독님과 많이 이야기했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동철의 처절한 액션들도 모두 그 한 장면을 향해 달려가는 듯했다. 엔딩신을 제일 마지막에 촬영했는데, 9개월간 동철로 살아 온 내 몸과 눈이 있었고, 그 점에서 감독님의 믿음도 컸다. 감독님이 '동철이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눈치를 보고 있다고 느껴질 만큼 많이 배려해 주셨다."
- 배우로서 '이 역할만은 꼭 해보고 싶다'는 것이 있다면.
"좋은 이야기를 담은 영화, 사소하더라도 살아가는 데 의미 있는 물음을 던지는 영화라면 배역의 중요도와 상관 없이 출연하고 싶다. 같은 배를 탔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니까. 좋은 기운을 가진 영화에 참여하는 횟수가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무엇보다 치열한 배우가 되고 싶다. 단순히 소모되는 배우가 아니라, 작품 안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작품으로 배우의 연륜을 쌓아가는 길을 가고 싶다. 후대의 누군가가 공유라는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보고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