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독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 동독 출신의 첫 통일독일 총리, 전후 최연소 총리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지만, 메르켈이 가진 주무기는 참신성뿐이었다.
1954년 서독 지역인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메르켈은 어릴 때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베를린 북쪽 50km, 동독 브란덴부르크주의 작은 마을 템플린으로 이주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1978년부터 1990년까지 동베를린 물리화학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정치 입문은 1989년 동독 민주화 운동 단체인 `민주적 변혁'에 가입,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됐다.
1990년 3월 동독 과도정부의 대변인 서리에 임명된 메르켈은 그해 동·서독 통일 후 치러진 총선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헬무트 콜 전 총리의 발탁으로 1991년 여성청소년부 장관, 1994년 환경부 장관에 오르고 1998년 총선에서 기독교민주당(CDU)이 패배하고 나서 당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동독 출신 여성 정치인이라는 단점을 극복하고 정치 입문 15년 만에 남성, 가톨릭 중심의 보수정당 당수를 거쳐 3기 집권을 노리던 노련한 승부사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물리치고 2005년 총리직에 오른 것은 독일 정치지형에 새로운 지평을 연 사건이었다.
헬무트 콜 전 총리가 키운 `정치적 양녀(養女)'로 성장했으나 끈기와 결단력으로 권력쟁취에 성공한 우파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에 견주어 `독일판 철의 여성'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무절제한 자본주의를 경계하며 사회적 시장주의를 지향하는 '따뜻한 보수주의자'의 면모를 갖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2005~2009년 첫 집권 당시 사민당과의 대연정에서 세계 금융위기에 따른 60년 만에 최악의 경기침체 속에서도 국내외적으로 침착함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실타래를 풀어나가 국민에게 강한 신뢰를 심어줬다.
2011년 하반기 본격화한 그리스발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 상황에서도 자유민주당과의 연정 내 불협화음을 잠재우며 긴축 중심의 위기 극복 및 경쟁력 강화 방안을 흔들림 없이 추진한 것이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됐다.
메르켈의 별명은 엄마를 뜻하는 '무티'(Mutti). `문제가 생기면 엄마가 다 알아서 해결해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국민에게 심어주면서 '무티 리더십'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은 기민당의 총선 승리 분석 기사에서 "메르켈리즘의 시대가 도래했다"며 '권력을 과시하지 않지만, 힘을 가진 정책'으로 대변되는 시대를 메르켈리즘의 시대로 규정했다.
1982년 첫 남편인 울리히 메르켈과 이혼한 메르켈 총리는 1998년 화학과 교수 요아힘 자우어와 재혼했으나 자녀는 없다. 고전음악팬으로 바이로이트 오페라 축제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휴가 때는 알프스 산중에서 하이킹을 즐긴다.
집에서는 남편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직접 장을 보는 등 평범하고 소탈한 모습을 잃지 않는 것도 인기의 비결이다.
참신한 총리로 출발했던 집권 9년차에 들어선 지금의 메르켈은 무게와 안정감, 냉철함, 끈기, 유연함을 두루 갖춘 실용주의적인 '경세가'로 평가받는다.
지난 총선에서 압승했음에도 사민당과 손을 잡은 것과 17시간여의 밤샘 마라톤협상 끝에 대연정 합의안을 타결한 것, 그리고 대연정 성사라는 '대의'를 위해서 사민당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고 주요 각료직도 대폭 양보한 통 큰 행보에서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그의 자신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메르켈 총리가 17일(현지시간) 3선 총리에 등극한 것은 독일 정치사에서 당파를 초월한 국가지도자들의 반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