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인 스티브 케니스는 1970년대 위암을 극복했던 오툴이 전날 런던 웰링턴 병원에서 별세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고인이 최상의 특출난 인물 중 하나였고 자신의 분야에서 거인이었다"고 애도했다.
1962년 주연을 맡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었다. 이후 오툴은 80세를 맞은 지난해 "배우라는 직업에 감사의 작별인사를 보낸다"며 은퇴하기까지 꾸준히 영화에 출연하며 연기에 애정을 표했다.
오랜 투병생활로 말년에는 너무 마르기도 했지만 오툴은 잘생긴 외모와 푸른 눈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베킷'(1964년), '겨울의 사자'(1968년), '굿바이 미스터 칩스'(1969년) 등 주연을 맡은 영화로 줄줄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무지막지한 음주로도 유명했다. 1975년 건강 문제로 술을 끊었지만 말썽쟁이와 무법자 이미지는 그를 수십 년간 따라다녔다.
연극무대와 스크린에서 우상으로 활약하던 오툴은 아카데미상과 관련해서는 8차례나 고배를 마신 '불운의 스타'였다.
1962년 출세작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처음 아카데미상에 후보로 지명된 이래 2006년 '비너스'로 여덟 번째 추천을 받았으나 끝내 본상 수상에는 실패했다.
그는 수상에 7번 실패하고 난 뒤 2003년 공로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에, 주인공은 못되고 늘 들러리만 섰네요"라며 진한 아쉬움을 표했다.
당시 71세였던 오툴은 상을 받기 전 "아직 활동 중이니 80세가 될 때까지 공로상을 미뤄달라"며 수상을 사실상 거절했으나 주최 측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상을 받았다.
오툴이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한 것은 '오스카의 실수'로 꼽힌다. 오툴에게는 '아카데미상 최다 수상실패 배우'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네 차례의 골든글로브상과 한 차례의 에미상을 받았다.
아일랜드 출판업자 아들로 태어난 오툴은 북잉글랜드에서 성장했으며 잠시 기자와 영국해군 무선병으로 일하다가 권위 있는 왕립연극아카데미에 들어가 수학했다.
연극아카데미에서 앨버트 피니와 앨런 베이츠, 리처드 해리스 같은 스타들과 함께 연기를 배웠다.
오툴은 연극무대에 등단하자마자 바로 유망주로 떠올랐으며 1955년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브리스톨 올드 빅에 올려 평단의 절찬을 받았다. 그는 여세를 몰아, 사막의 서사시라고도 불린 대작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오툴의 별세 소식에 각계의 추모가 이어졌다.
마이클 히긴스 아일랜드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아일랜드와 전 세계는 영화계와 연극계의 거물 중 하나를 잃었다"고 추모했고,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오툴의 연기는 너무나 멋졌다"고 회고했다.
영국의 유명 영화평론가이자 오툴의 친구였던 배리 노먼은 "정말 잘생기고 매력적이었던 사람"이라며 "아카데미상을 여러 번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동료 배우 마이클 치클리스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속 날카로운 푸른 눈은 잊히지 않을 것"이라며 "그는 배우 중의 배우였다"고 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