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건강권, 담배연기와 함께 사라지다

[변상욱의 기자수첩]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유럽연합은 금연 정책을 강하게 추진 중이다. 담배와 관련된 질병으로 유럽에서만 연간 70만 명이 사망하고, 의료비용은 연간 230억 유로를 넘어서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유럽집행위원회 승인이 끝난 흡연규제방안을 보면 담뱃갑 포장 앞뒤로 "흡연이 당신을 죽인다. 당장 끊어라!"라는 경고 문구와 질병사진을 넣도록 되어 있다. 그것도 65% 이상을 차지할 만큼 넓게 넣도록 규정하고 있다. 청소년이 담배 배우기 쉽도록 집어넣던 박하, 바닐라, 딸기 향의 첨가는 금지된다.

담배의 해독이 적어 보여 흡연을 유도하는 슬림형 담배는 생산을 금지시키려 했으나 무산됐다. 담배회사의 로비에 밀린 때문이다. 첨가물 금지도 2015년부터 전면시행 하려던 것인데 역시 로비에 밀려 2022년부터로 미뤄졌다.

담배업계가 EU로비에 쓰는 비용이 연간 500만유로(약 70억 원)나 되고 풀타임 로비스트 100명을 고용하고 있다는 소식. 올 2월에 폭로돼 유럽의회에서 청문회까지 열린 큰 이슈였다. EU 보검담당 집행위원이 이 문제로 사임하기도 했다. 문제는 발각된 로비가 이 정도이지 다 드러나면 어느 규모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담배회사의 로비는 영국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영국은 담뱃갑에서 상표를 없애려는 정책을 준비하다 뒤로 미뤘다. 보수당 자문위원이 담배회사 로비(필립 모리스, 브리티시아메리칸 토바코)에 연관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사태가 정리되고 다시 추진되고 있지만 전 세계 어디에서건 다국적 담배회사의 로비는 뿌리가 깊고 강하다. 담배회사들은 유엔과 세계보건기구가 흡연규제에 나서는 것을 막기 위해 수십 년 간 로비를 펼쳐왔다. 세계보건기구의 경우 1987년 ‘smoke free society 연기 없는 사회’를 목표로 내걸 만큼 흡연을 인류 건강의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다.

여기에 담배회사들이 로비로 맞서 정계와 학계, 언론계를 움직였고, 세계보건기구는 2012년 세계금연의 날 표어를 “담배회사의 거짓말과 음모”라고 내걸었다.

◈ 연기 없는 세상을 위해

최근에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담배회사들의 새로운 강적으로 등장했다. 유럽이라는 거대한 담배소비시장의 축소도 문제지만 유엔과 세계보건기구의 흡연규제가 유럽연합으로 이어지고 나면 그 다음은 새로운 담배 소비시장인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흡연규제의 싸움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1년 전 호주가 세계 최초로 모든 담배 제품을 똑같이 포장하는 제도를 시행했고 뉴질랜드도 준비 중이다. 뉴질랜드는 담배에 붙는 세금을 인상하고 금연구역을 확대한 뒤 올해 성인 흡연율은 15.1%로 나타났다. 지난 2006년 조사 때는 20.7%. 2025년까지 금연국가로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일반적으로 흡연율이 5% 밑으로 떨어지면 실질적 금연국가로 본다.

러시아도 지난해부터 강력한 흡연규제 정책을 펴왔는데 더 강화할 계획이다. 내년까지 세금을 44% 늘리고 2015년에는 지금보다 100% 올릴 계획이다. 공공장소에서 흡연 시 최대 1500루블(약 5만 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방안도 담배규제법에 들어 있다.

러시아에서 담배 1갑은 1달러가 안 된다. 값이 싸니 흡연 인구는 전체 인구의 40%로 세계 최고의 흡연국가이다. 2012년 흡연관련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40만 명.

다국적 담배회사 로비 문제가 우리나라에서도 터져 나왔다. 담배회사들은 1980년대부터 전 세계 의학자.과학자들을 끌어들여 담배의 해로움을 축소시키는 여론을 만들어 왔는데 여기에 우리나라 학자들도 들어 있다는 것.

지난 9일 서울대에서 ‘건강과 기업’을 주제로 한 건강정책학회 학술대회에서 ‘담배회사로부터 돈을 받은 한국의 연구자들’의 실명이 공개됐다. 담배와 코리아 등을 키워드로 해 담배회사들의 관련 문건 2천여 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분석해 담배회사 로비 프로젝트에 간접적으로 연루된 한국인 학자의 이름을 뽑아 낸 것.

반면, 담배회사의 검은 유혹을 거절한 학자도 있었다. 담배회사 후원으로 열리는 포르투갈 리스본 회의의 기술위원직 제안을 받은 모 의대 교수는 이를 단연코 거절하고 그 날 먹은 점심값을 자신이 내고 자리를 떴다고.

◈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동안 담배 흡연이 암을 유발하고 담배의 니코틴은 중독성이 강하다고 맨 처음 알아차린 것은 담배회사들이었다. 물론 담배회사들은 수십 년 동안 이를 숨겼다. 직접 피우지 않고 간접흡연만 해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라는 것도 담배회사들이 먼저 발견했다. 이것 역시 철저히 숨겨오다 들통 났다.

이런 상황에서 흡연 규제정책을 만들거나 보건정책을 논의할 때 담배회사들을 ‘이해당사자’로 보고 논의에 끼어주는 것이 과연 적절한 일일까? 국민 생명과 보건에 관한 정책을 만들고 시행하는 일인 만큼 그 반대편에 있는 상업적 이익은 협의와 자문의 파트너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흡연규제도 가다 멈추다를 반복한다. 정부의 재정 담당부서는 세금이 아까워 “담배는 기호식품으로서 흡연의 시작과 중단은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근거하는 것으로, 흡연권 역시 헌법상의 권리”라고 주장한다.

그 반대편에 서야 할 보건복지부는 입을 다문다. 국민건강증진부담금을 담배에서 거두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하랴. 흡연의 폐해를 널리 알릴 금연 정책의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가 담배 회사의 돈을 얻어 쓰고 있는 셈이다. 물론 국민의 건강과 생명이 담보로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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