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을 궁에 살아온 한많은 여인의 역사-한중록

고궁 전각에 얽힌 재미있는 뒷 얘기 시리즈㉑ 창경궁 경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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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경춘전. 혜경궁 홍씨가 81세를 일기로 한많은 일생을 마친 곳이다. (사진=문영기 기자)
▲너무 오래 살아 한(恨)이 많은 여인 -혜경궁 홍씨

창경궁 경춘전에 햇살이 드리워졌다. 백발의 여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다 결국 숨을 거뒀다.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다.

81세까지 살았으니 당시 조선의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오래 산 만큼 행복하지 못했다.

혜경궁 홍씨는 나이 아홉 살에 세자빈으로 간택됐다. 노론쪽의 명문가 홍봉한의 딸이다. 그녀가 궐에 들어와 산 세월은 무려 70년을 헤아린다. 재위 기간이 50년이 넘는 영조를 비롯해 정조, 순조까지 3명의 왕와 함께 했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 10년간에 걸쳐 한중록을 집필한 혜경궁 홍씨. (국립극단 홈페이지에서 발췌)
혜경궁 홍씨는 세자빈으로 간택된 뒤, 세손(정조)을 낳아 영조의 총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편인 사도세자와 시아버지 영조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면서, 혜경궁 홍씨의 인생행로는 불행으로 점철되기 시작했다.

사도세자는 잘 알려진 대로 아버지 영조의 명에 따라 뒤주에 갇혀 숨을 거둔 비극의 주인공이다. 남편이 고통속에 숨을 거두는 장면을, 그것도 9일동안 지켜보는 심정은 헤아리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슬픔을 내색할 수 조차 없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정치세력이 그녀의 아버지가 이끄는 노론세력이었던데다, 아들(정조)의 안위를 지켜야할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아들의 안위를 지켜줄 사람은 남편을 죽인 시아버지 영조뿐이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품에서 떠나보내기로 했다.

그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그녀는 자식을 포기해야 했다.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자 생명을 담보할 수 없는 불안한 처지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어린 나이에 요절한 영조의 큰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자신의 금쪽같은 아들을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임금 정조. 보위에 오르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복권이었다.(홈페이지에서 캡쳐)
▲아들과 며느리에게 당한 정치보복

정조가 보위에 오른 뒤 처음 한 일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이었다. 이는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정치적인 행위이기도 했다.

노론에 대한 탄압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사도세자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아버지 홍봉한은 관직에서 밀려나 역적소리를 듣다 사망했고, 작은 아버지 홍인한은 영조에게 세손(정조)의 즉위를 반대하면 올렸던 ‘삼불필지(三不必知)’가 문제가 돼 결국 사사되고 말았다.

훗날 정조가 홍씨 가문, 즉 외가에 대한 가혹한 처사를 뉘우치고 어머니 홍씨에게 효도를 다했지만, 불과 5년도 지나지 않아 아들 정조는 어머니 홍씨보다 먼저 눈을 감고 말았다.

아들 정조가 승하하자, 일시나마 평온했던 혜경궁 홍씨의 삶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조의 보위를 물려받은 나이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의 대리청정이 시작된 것이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계비다. 영조가 환갑이 지나 맞은 부인인데, 시집올 때 나이가 열 여섯이었다. 남편 영조와 무려 쉰 한 살의 차이가 나고,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보다도 열 살이 어렸다.

더구나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만큼, 혜경궁과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수렴청정을 하면서 조정의 권력을 한 손에 틀어 쥔 정순왕후는 자신보다 나이 많은 며느리 혜경궁 홍씨와 홍씨의 가문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혜경궁 홍씨의 지위는 며느리보다 낮게 격하됐다. 그녀는 심지어 친손자인 순조의 혼례식때 폐백조차 받지 못했다.

그녀는 경주 김씨의 세도가 판을 치던 순조 재위기간중 왕실 어른으로서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한 채,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실상 갇혀 지내다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은 현장. 창경궁 문정전 (사진=문영기 기자)
▲ 한 많은 여인의 궁중잔혹사? 한중록(閑中錄)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1795년부터 1805년까지 10년동안 집필한 일종의 회고록이다. 1편은 정조때 자신이 회갑을 맞은 해에 쓰여졌다. 어쩌면 그녀가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세편은 순조 1년, 동생 홍낙임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된 뒤 쓰여졌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의 개인 기록이지만, 당시 조선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과 암투가 생생히 그려진 궁중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중록에서 묘사되는 사도세자는 정신병자다. 아버지 영조와 갈등이 생기면서 정신병이 심해지기 시작한 세자는 비구니를 궐 안으로 끌어들이는가 하면, 궁녀와 내관을 마구 살해하는 기행을 일삼았다.

결국 반대세력의 계속된 상소와 이간질로 영조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남편인 사도세자는 뒤주에서 숨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이었던 사도세자의 죽음과 자신의 친정이자 정치세력이었던 노론에 대한 시각은 편향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일부 사학자들은 사도세자의 이 이야기가 진실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도세자는 노론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노론의 핵심이었던 홍봉한이 사위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혜경궁 홍씨는 이를 묵인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복수로 인해 멸문한 자신의 가문을 위한 변명이라는 것이다.

한중록이 개인의 기록인 만큼 이같은 반론은 물론 가능하겠지만, 가문을 비호하기 위해,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을 놓고 사실을 왜곡했을지...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싶다.

조선왕비가 그려진 드라마의 한 장면. 조선의 왕비는 내명부를 관장하고 수렴청정을 하는등 권한이 막강했다. (홈페이지에서 캡쳐)
▲조선의 왕비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죄인으로 죽임을 당하면서, 왕비가 되지 못한 여인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왕비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조선의 왕비는 왕의 정실부인이다. 임금은 후궁을 여러 명 둘 수 있었지만, 부인은 한명 뿐이다. 왕비는 조선의 어머니 역할을 수행해야 했으므로 막중한 임무와 그에 따른 권한이 주어졌다.

후궁들은 지위에 따라 정1품부터 종4품까지 품계를 받았지만, 왕비는 왕과 마찬가지로 품계가 없다. 품계를 초월했다는 것은 후궁과는 비교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존엄한 위치라는 의미다.

왕비는 후궁과 궁녀등 궁궐안에 기거가는 모든 여성들을 관리하고, 궁궐 살림을 운영한다. 막강한 권한이다.

왕비의 권한이 크고 막강한데다, 절대권력인 왕과 지근거리에 있는 외척이라는 입지는 조정에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이는 조선왕조의 역사가 실증하고 있다.

따라서 왕비는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정치적인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왕실에서 최연장자가 될 경우 왕비는 왕과 같은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왕비는 왕통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임명할 수 있었고, 수렴청정을 통해 정치에 직접 관여할 수 있었다. 수렴청정을 통해 섭정한 여인만해도 무려 여섯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순조의 왕비였던 순원왕후는 헌종과 철종 2대에 걸쳐 수렴청정을 했다. 조선의 왕이 27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비율이다. 누가 조선시대를 여성들의 인권이 없는 암흑기라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혜경궁 홍씨도 아들 정조가 일찍 승하하면서 수렴청정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역시 남편 사도세자가 발목을 잡았다. 사도세자가 폐위되면서 혜경궁 홍씨는 왕비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아버지는 그녀의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녀의 아들과 그녀보다 열 살 어린 그녀의 며느리는 그녀의 친정에 가혹한 정치보복을 가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閑中錄)이 설령 가문을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녀의 일생이 한(恨)으로 얼룩진 질곡의 삶이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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