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발칵 뒤집은 단돈 80만원 레알 어드벤처

[노컷이 만난 사람]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4총사

지난 18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CGV에서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4총사인 김휘, 이현학, 하승엽, 이호재(왼쪽부터)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이명진 기자 mjlee@nocutnews.co.kr
2009년 9월 스스로를 '잉여'라 부르던 20대 초중반 남자 넷이 80만 원과 카메라 1대 달랑 품고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 다니던 대학 영화학과까지 나란히 그만두고 떠난 그들의 계획은 단순하고도 무모했다. 유럽 전역을 돌며 숙박업소들의 홍보영상을 찍어 주는 대신 업소들로부터 숙식을 제공받는 형태로 1년을 지내다가, 유럽에서 촉망 받는 뮤지션의 뮤직비디오 연출을 끝으로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이들 무모한 잉여 4인방은 천신만고 끝에 자신들이 세운 계획 이상의 것을 이루고 이듬해 9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프랑스·이탈리아·터키·불가리아·스코틀랜드·잉글랜드를 거치는 동안 넷은 유럽 숙박업계의 유명인사가 됐고, 영국 뮤지션 2명의 신곡 뮤직비디오까지 연출한 뒤였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지난달 28일 이들의 거짓말 같은 유럽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이 극장에 걸렸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어느덧 20대 중후반이 된 잉여 4인방 이호재(29) 하승엽(27·일명 하비) 김휘(25) 이현학(25)을 서울 명동에 있는 한 극장에서 만났다. 호재는 감독으로서 영화 개봉 준비와 홍보 관련 일로 정신이 없고, 올 5월 군복무를 마친 현학은 영화 관련 공부를 하며 호재를 돕고 있다. 올 4월과 지난해 12월 입대한 하비, 휘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 "학교 그만두고 유럽 가자" 무모한 도전 단 10분만에 결정


리더 호재에게 유럽으로 떠나면서 굳이 학교까지 그만 둔 이유를 물었다. "돌아올 곳이 있으면 중간에 계획을 포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아예 여지를 없애자는 데 넷이 동의했고, 모든 게 10분 만에 이뤄졌죠. 우리는 학교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아니었어요. 돌아간다 해도 대학의 경쟁 구도에서는 살아남기 힘들었겠죠."

당시 스무 살로 신입생이던 막내 휘와 현학은 두렵지 않았을까. 휘는 "돌이켜 보면 잘못된 선택이 아니어서 고맙게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휩쓸린 면이 컸다"며 웃었고, 현학은 "첫 해외여행에 대한 설렘, 좋은 친구들과 함께 간다는 데 환상이 있었다"고 전했다.
영화과 학생 시절 넷은 조별 과제를 하면서 서로의 비슷한 면을 발견했다. 과에서 소위 톱클래스도 아니었고, 경쟁이라는 옷이 몸에 맞지도 않았다. 과제를 미루다 제출일에 쫓겨 부랴부랴 만들면서도 서로 불평하지 않았고, 결과물도 만족스럽게 나왔다.

유럽에서 만든 홍보영상의 주인공을 도맡으며 그쪽 숙박업계의 스타가 된 하비는 여행 전 넷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능력은 있는 것 같은데 구체적이지 않았고, 사회에서 일할 걸 생각하면 뭔가 이루고는 싶은데 행동하지 않았죠. 집에 누워 있으면서 친구 전화 기다리는 일이 많았지만, 막상 일을 하고 싶을 때는 할 일이 없었어요."

막내 현학은 "제 경우 태생적으로 경쟁을 싫어하는데, 영화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대학에 와 보니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며 "익숙하지 않으니 그 경쟁에서 자연스레 빠지게 됐고, 주변을 돌아보니 우리 넷이 있더라"고 설명했다.



■ 히치하이킹·노숙하며 무일푼 물물교환 7328km 여행

배수진을 치고 유럽에 간 이들의 초반 생활은 말 그대로 눈물겨웠다. 히치하이킹과 무임승차 등으로 7328km를 이동하면서 차가운 길에서 끼니를 때우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여정은 추위를 피해 이탈리아 로마까지 이어졌고, 포기하기로 마음 먹은 순간 홍보영상을 만들어 보자는 첫 제의가 들어왔다.

여정을 이어갈 절호의 기회를 얻었지만, 완성된 영상을 본 호재는 '우린 망했다'고 생각했단다. "우린 절박했어요.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던 하비에게 이상한 행동을 시키면서 일단 찍고는 특수효과를 맡은 휘에게 떠넘기는 식이었죠. 완성된 영상은 숙박업소를 부수고, 폭파시키는 등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죠. '큰일났다'는 절망감이…. (웃음)"

하지만 영상은 현지 숙박업계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인터넷을 통해 유럽 전역에 퍼졌다. 현학은 "첫 영상을 만들고는 업소에 이걸 보여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런 반응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이런 게 문화 차이인가라는 생각도 들더라"고 했다.

그렇게 이들의 일거리는 끊이지 않았고, 숙식 해결은 물론 약간의 돈까지 벌게 됐다. 순탄하게 마무리될 듯했던 넷의 여정은 마지막 계획인, 은퇴를 앞둔 영국 뮤지션 아르코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면서 결정적인 고비를 맞게 된다. 귀국 날에 쫓기던 잉여 4인방은 결국 '뮤직비디오 연출을 포기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지만, 아르코로부터 '너희는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고 부르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는 내용의 답신을 받는다.

그 답신을 가장 먼저 본 호재는 그때 심정을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으로 포기했다는 것에 회의가 들고 한심하더군요. 그 전에는 '우리는 잉여니까 그래도 돼'라는 식으로 합리화시켜 왔는데 말이죠. 내가 마무리해야 한다는 자발적인 의지를 처음으로 갖게 된 일이었죠."

나머지 멤버들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하비는 "편지 내용을 알았을 때는 내 수준이 드러났다는 데 아차 싶었다"며 "좀 더 할 걸, 해 볼 걸이라는 생각에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컸다"고 전했다.

결국 넷은 아르코의 뮤직비디오를 완성하기 위한 자발적인 실천에 나섰고, 서로에 대한 믿음을 새삼 확인하며 여정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 기나긴 과정을 오롯이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자신들이 걸은 길을 널리 소개하고 있다.

■ "다음은 밴드음악 보여주겠다" 잉여들 제2프로젝트 준비중

이제는 잉여보다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이라는 말이 더욱 어울릴 법한 넷은 벌써부터 제2의 여정을 준비 중이다. 그 여정의 주제는 밴드음악이다. 각자 기타, 베이스 겸 기타, 피아노·키보드, 드럼을 배워 뮤지션들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주고 함께 공연하면서 교감을 쌓겠다는 것이다.

현학은 "하비 형과 휘가 제대하는 시점에 맞춰 빠르면 2년 뒤 실천에 옮겨질 것"이라며 "조명을 담당했던 저로서는 첫 여정 당시 조명기가 없어 멍하니 있었는데 '뭐든 배울 수 있을 때 배워두자'는 마음으로 지금 영상 제작에 쓰일 컴퓨터 그래픽을 배우고 있다"고 전했다.

휘는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이번 영화에서는 저를 제대로 못 보여 줬는데, 두 번째 여정에서는 제 독특한 캐릭터를 잘 살리겠다"며 "군대에서 자기계발 시간에 기타를 배우는 중이고, 내년 9월 제대하면 결정된 제2의 여정으로 흘러갈 것이다. 경쟁에서 우리는 경쟁력이 없는 만큼, 쭉 해 왔듯이 앞으로도 딱히 이렇다 할 틀 없이 즉흥적이고 막연하게 살 계획"이라고 했다.

하비 역시 "기본적으로 하기 싫고 힘든데 열심히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막연하더라도 좋은 것을 충실히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며 "2015년 1월29일 제대하면 '아닌 것 같다'고 푸념하다가 멤버들에게 끌려갈지도 모르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잘 준비하겠다"고 했다.

리더 호재는 "음악하기에는 늦었다고 말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다"는 뚜렷한 의지를 전했다. "지금도 우리가 어떤 흐름에 합류됐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우린 아직 젊으니 더 성장해야 하지만, 주류라고 정해놓은 길이 협소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갈 수 없잖아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굳이 구분짓기도 싫어요. 우리는 누군가와 경쟁하지 않고 우리끼리 뭉쳐서 나아가면서 굉장한 가능성을 봤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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