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성불구로 만든 여인 장희빈(후편)

고궁 전각에 얽힌 재미있는 뒷 얘기 시리즈⑲ 창경궁 통명전

몇해전 방영된 드라마 동이. 장희빈을 몰아낸 숙빈 최씨가 주인공이다. (홈페이지에서 캡쳐)
▲무수리 최씨, 장희빈을 넘어서다

몇해 전 ‘동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궁궐의 음악을 책임지는 장악원(掌樂院)을 중심으로 펼쳐진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당연히 ‘동이’다. ‘동이’가 그리고 있는 인물은 임금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다.

드라마에서는 최씨가 장악원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묘사되지만, 숙빈 최씨는 사실 천민출신의 무수리였다. 무수리는 궁녀 가운데서도 가장 험한 일을 하는 직종이다.

주된 임무는 물긷기, 불때기등 여러 가지 허드렛일이었고, 각 처소의 잡일을 도맡아했다. 장희빈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춘택의 천거로 궐에 들어왔는데, 왕비 즉, 인현왕후의 처소에서 일을 했다.

후에 임금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게 되고, 후궁으로 신분상승이 이뤄진 최씨는, 결국 조선시대 가장 위대한 임금 가운데 한명으로 추앙받는 ‘영조’를 낳는다.

인현왕후를 밀어내고 중전의 자리를 차지한 장옥정으로서는 숙빈 최씨가 눈의 가시일 수 밖에 없었다. 임금 숙종이 자신을 젖혀두고 숙빈 최씨를 가까이 하자, 장희빈의 불안과 질투는 더 심해져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숙빈 최씨의 임신 소식이 전해졌다. 장희빈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질투에 눈이 먼 숙빈 최씨를 불러 매질을 시작했다. 같은 시간 임금 숙종의 꿈속에 신룡(神龍)이 나타나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꿈을 이상하게 여긴 숙종이 장희빈의 처소로 달려가보니 아무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발길을 돌리려던 숙종이 담 밑에 있는 커다란 독을 발견했다.

엎어진 독을 바로 세우자, 그 속에 숙빈 최씨가 결박을 당한 채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야사에 전해지는 내용이어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장희빈의 질투가 어떠했는지, 또 궁중 여인들의 암투가 얼마나 심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최후의 승자는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듯이 무수리 최씨였다.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장희빈.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중전의 자리에 올랐지만, 지나친 투기로 임금의 신임을 잃은데다, 당파싸움에 휘말려 결국 사사되고 만다. (홈페이지에서 캡처)
▲대담한 여인-숙빈 최씨

김춘택의 천거로 궐에 들어온 무수리 최씨는 별로 눈에 띠는 인물은 아니었다. 더구나 무수리가 하는 일의 특성을 비춰볼 때 임금의 눈에 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헌데 어떻게 최씨는 임금의 눈에 들어 왕위를 물려받을 왕자까지 생산할 수 있었을까?

동지중추부사(종2품)를 지낸 이문정이 쓴 수문록(隨聞錄)에 따르면, 최숙빈과 관련한 얘기가 나온다. 밤에 잠 못이루던 임금 숙종이 궁궐을 거닐던 중, 나인들의 방 근처를 지나게 됐는데, 유독 한 나인의 방에만 휘황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궁금해진 임금이 그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 궁녀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마치 누구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임금은 당연히 이유가 궁금했을 것이다. 궁녀의 답변은 의외였다. 폐서인돼 궁궐밖으로 내쳐진 인현왕후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상을 차려 놓았다는 것이다.

무수리에서 후궁에 오른 숙빈 최씨. 대담한 행동으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홈페이지에서 캡처)
여느 궁녀였다면 느닷없는 임금의 출현에 상당히 당황했을것이 분명하고, 임금의 하문에 제대로 답변도 어려웠을 것인데, 무수리 신분의 궁녀는 담대하게도 그것도 폐서인을 입에 올리며 그녀를 위한 생일상이라고 당당히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무수리 최씨는 임금의 후궁이 될 수 있었고, 장희빈의 질투와 혹독한 탄압을 이겨내고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냈다.

하지만 숙빈 최씨는 끝내 중전의 자리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장희빈의 악행에 지칠대로 지친 숙종이 궁녀로 후궁이 된 여인은 중전이 되지 못하도록 교지를 내려버린 것이다.

또한 숙빈 최씨 역시 말년에는 궁궐밖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되고 마는데, 이는 그를 천거한 김춘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동이에 등장하는 심운택. 가상의 인물이지만, 동이를 궐에 천거하고 장희빈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춘택을 묘사하고 있다. (홈페이지에서 캡처)
▲미남 김춘택과 숙빈 최씨의 미묘한 관계

장안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숙빈 최씨가 낳은 둘째 아들이 임금의 씨가 아니라는 해괴한 소문이었다. 여염집 여인도 아닌 임금의 핏줄을 낳은 후궁이 다른 사내와 통정했다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다른 사내의 자식을 임금의 자식으로 감쪽같이 속였다니..

온 장안이 들끓었고,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작업이 은밀하게 진행됐다. 아이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숙빈 최씨를 궐에 천거한 김춘택이라는 것이었다.

숙종의 이상한 태도도 이같은 소문이 퍼지는데 일조했다. 영조가 태어난 날은 1694년 9월 13일인데, 실록에는 9월20일에 영조의 탄생이 기록돼 있다. 7일 동안이나 영조의 탄생은 비밀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 숙종은 산후조리 90일동안 숙빈 최씨의 처소를 단 한번도 찾지 않았다.

아뭏튼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조정에서 나서 소문의 확산을 막은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는지 모르지만, 이 소문은 점차 잦아들었다.

김춘택은 남인에게 밀려났던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노론이 정권을 잡은 뒤에도 승승장구하기는 커녕 이 해괴한 소문 때문에 귀양길에 오르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리고 그는 영영 조정에 복귀하지 못한 채 귀양지를 전전하다 객지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후에도 김춘택이라는 이름은 입에 올릴 수 없는 금기였다.

영조가 즉위한 뒤 권력에서 밀려난 소론이 임금을 흠집 내기 위해 퍼뜨린 소문도 바로 영조가 숙종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영조 초기, 반란을 일으켰던 이인좌도 이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흔들려고 했다.

정권을 잡은 노론에게 김춘택은 더 이상 은인이 아니었다. 반대파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해 줄 약점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가 간직한 비밀이 정말 사실이라면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뒤흔들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제거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드라마속 숙종. 당쟁이 극심했던 재위기간동안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위해 여인들을 이용했던 냉혹한 정치인이다. (홈페이지에서 캡처)
▲여인에게 휘둘린 숙종? 정쟁에 여인을 이용한 냉정한 승부사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임금 숙종은 여인들의 치마폭에 싸여 정사를 그르치는 우유부단한 왕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실제로 숙종은 여인들에게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였을까?

숙종이 재위기간(1674-1720)은 당파싸움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집권세력도 수시로 교체됐다. 1680년 서인정권이 부활했다. 9년만에 남인정권으로 넘어갔고, 다시 5년만에 서인이 집권했지만,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됐다.

이때 승리한 소론이 집권했지만, 결국 정권을 잡은 것은 노론이었다. 이렇게 복잡한 정국 속에서 숙종은 일종의 조정자의 역할을 해야 했고, 왕권유지를 위해 자신의 여인들을 도구로 이용하는 냉혹한 위정자 역할을 감당해야했다.

숙종 당시 피비린내나는 정쟁이 벌어졌던 창경궁 전경. (자료제공=문화재청)
인현왕후가 중전이 된 것은 서인세력이 집권한 직후였다. 하지만 서인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하자, 숙종은 남인 출신의 장옥정을 희빈으로 삼아 서인세력과의 갈등관계를 유도했고, 결국 남인세력을 통해 서인을 몰아냈다.

하지만 장희빈의 남인 세력이 커지자, 숙종은 대항마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바로 숙빈 최씨다. 장희빈을 사사하고 정국이 점차 안정을 되찾자 숙종은 최씨에게 냉담해 지기 시작한다.

김춘택과의 해괴한 소문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녀 뒤에 있는 정치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컷던 것이 사실이다. 장희빈을 몰아낸 숙빈 최씨의 ‘독주체제’가 시작되기도 전에 숙종은 새로운 중전 인원왕후를 맞아들였고, 후궁을 셋이나 더 두면서 숙빈 최씨는 결국 궐을 떠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중전에서 내쫒았던 인현왕후를 다시 복귀시키는가 하면, 왕위를 물려 줄 아들의 어미 장희빈을 끝내 사사하고, 장희빈의 대항마로 키운 숙빈 최씨마저 궐에서 내쳤던 임금 숙종.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아내를 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숙종은 당쟁이 가장 심했던 권력투쟁의 틈바구니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승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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