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뉴스]채명신 장군은 왜 사병묘역 안장을 원했을까?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영웅이면서 생활에서도 타인의 귀감

뉴스의 속사정이 궁금하다. 뉴스의 행간을 속 시원히 짚어 줍니다. [Why 뉴스]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를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마련된 일반 병사들 묘역인 제 2묘역에 마련된 고 채명신 장군 묘자리. 윤성호 기자
지난 25일 별세한 채명신 에비역 중장, 비록 돌아가신 분의 얘기지만 타의 귀감이 되는 모습을 보여 듣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채명신 장군은 초대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중장이다. 그런데 이 채명신 장군이 별들의 무덤 대신 사병묘역을 선택했다. 계급은 다르지만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전우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 유언이 실현됐다.

군 장성출신이 사병묘역에 안정되는 건 채명신 장군이 처음이다. 채명신 장군은 살아서는 '전쟁영웅'으로 죽어서는 '참군인'으로 후배군인들의 귀감이 되고 사표가 되었다. 특히 사회가 돈이나 권력 명예만 좇는 이기주의적인 모습이 넘쳐나고 있는데 스스로를 내려놓고 낮춤으로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래서 오늘 (Why뉴스)에서는 "채명신 장군은 왜 사병묘역 안장을 원했을까?"라는 주제로 그 속사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육군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죠?

= 그렇다. 오늘(28일) 오전 10시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육군장으로 엄수되고, 오후 3시 베트남전 전사자들이 묻힌 제2묘역(월남파병전사자묘역)에서 안장식이 거행된다.

채 장군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26.4㎡(8평)의 장군묘역이 아닌 3.3㎡(1평)의 사병묘역에 안장된다.

육군장은 현역 전사자이거나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경우에 해당되지만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군인이 사망했을 경우에도 대상이 된다고 한다.

영결식에서는 가수 패티 김이 조가로 찬송가 '내영혼이 은총 입어'를 부른다. 채명신 장군과 패티 김은 1966년 신혼여행 대신 베트남전 위문공연을 계기로 인연을 맺어 47년 우정을 이어왔다.

▶채명신 장군이 예비역 장성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사병묘역 안장되는데 언제부터 사병묘역 안장을 원했나?

= 상당히 오래된 일이라고 한다.

채 장군을 20년 넘게 보좌해온 정재성 보좌관(통역장교 출신, 예비역 육군대위)은 "'전우들 곁에 묻히겠다는 얘기를 들은 지 한참 됐다"고 말했다.

정재성 보좌관은 "사령관님은 다른 장군과 다르다. 월남사령관을 하면서 많은 장교와 사병들이 전사했다. 5천여 명 넘게 사망했다. 항상 마음 아파하시고 나는 목숨을 부지했는데 이 친구들은 여기에 묻혀있다……. 내가 죽으면 여기 전우들하고 같이 묻혀야 되겠다. 이게 늘 원이 있었다"고 말했다.

채 장군의 부인 문정인 여사도 "(채 장군이) 집(동부이촌동)에서 국립현충원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부하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전역 직후부터 그런 얘길 했고 병상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언급을 했다"고 전했다.

▶쉽지 않은 결정일 텐데 어떤 계기로 이런 결심을 하게 됐나?

=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다.

채 장군이 장군묘역 대신 사병묘역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정재성 보좌관은 '애국심과 부하사랑'이라고 말했다.

정재성 보좌관은 "채명신 장군은 다른 지휘관과 달리 전쟁을 경험한 분인데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을 실전을 경험한 분이다. 자기가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닌데 그래서 전사자의 애절함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며 "채명신 장군이 현충원을 찾아 부하들의 묘비를 붙잡고 통곡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그기에 묻혀야 되겠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군묘역과 사병묘역이 어떤 차이가 나는 거냐?

= 장군묘역과 사병묘역은 큰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만 장군묘역과 장교묘역, 병사묘역으로 구분이 된다.

장군묘역과 사병묘역의 차이는 무덤의 크기가 8배 차이가 난다. 장군묘역은 26.4㎡(8평)이고 사병묘역은 3.3㎡(1평)이다. 여기에 묘비도 큰 차이가 난다. 장교나 사병들의 묘비는 높이 76㎝ 가로 30㎝이지만 장군들은 높이 90㎝ 가로 36㎝이고 여기에 단(가로 106㎝ 세로 91㎝ 높이 15㎝)을 세울 수 있다.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마련된 장군묘역. 윤성호기자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마련된 일반 병사들 묘역인 제 2묘역에 마련된 고 채명신 장군 묘자리. 윤성호기자
특히 장군묘역에 무덤에 봉분을 하고 시신으로 안장을 할 수 있지만 일반 묘역은 화장한 유골만 안장이 가능하다.

국방부의 보도자료에도 "장군신분으로서 장군묘역 안장 혜택을 포기하고,..."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을 정도다.

▶살아서는 '전쟁영웅'으로 죽어서도 '참군인'으로 칭송을 받는데 실제 생활에서도 귀감이 되었다는데?

= 그렇다. 채명신 장군은 평소에도 권위나 의전에 연연하지 않고 청렴한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육군 공보과장을 맡고 있는 전병규 대령은 "(채 장군이) 예편이후 국방부나 육군 등에서 강연을 하거나 방문할 일이 있을 때에도 권위를 내세우거나 특별한 의전을 요구하지 않았다"며 "그런 모습들이 후배군인들의 귀감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채명신 장군은 2003년 PKO 파병장병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면서 베트남전의 경험을 언급했는데 당시 대민작전을 나가면서 부하들에게 강조한 얘기가 "베트콩 100명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주민(양민)을 보호하라"는 명령이었다는 걸 전하면서 이런 자세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채 장군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등의 훈장을 받을 정도로 혁혁한 무공을 세운 '전쟁영웅'이었다.

채 장군을 잘 아는 국방부관계자는 "전쟁영웅이 일반 삶에서 귀감이 되기가 쉽지 않은데 채 장군은 타의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되었다"면서 "아마도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며, 채 장군이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간증을 통해 전도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병묘역 안장을 결정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던데?

김관진 국방부장관. 윤창원 기자/자료사진
= 채 장군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사병묘역 안장은 쉽지 않았다. 채 장군이 병세가 악화되자 가족과 보좌관들이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사병묘역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했지만 국방부나 현충원에서는 장군묘역과 장교묘역, 병사묘역으로 구분하고 있는 '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때문에 난색을 표명했다고 한다.

가족이나 측근들은 난색이나 곤란으로 표현을 하지만 국방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참고로 국립서울현충원은 국방부 소관이고 국립대전현충원은 국가보훈처 소관이다.

정재성 보좌관은 "규정도 없고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늘 장례식인데 어제 아침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대전으로 갈 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상당수 언론보도에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될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결국 청와대가 나서서 사병묘역 안장을 결정했다고 한다. 채 장군의 측근은 "청와대 김기춘 비서실장이 어제(27일) 오전 문정인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가신 분의 유지를 따르는 것이 예의라고 박근혜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다"는 걸 알려왔다고 말했다. 이어서 오후에는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빈소를 방문에 공식적으로 사병묘역에 안장하기로 했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김관진 국방장관은 채 장군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을 찾아 유족들에게 정부의 결정을 공식 전달했다. 김 장관은 "고인은 군의 정신적 지주이셨다"며 "파월 장병들과 같이 묻히고 싶다고 유언하셔서 그 유지를 받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개헌에 반대했다는데?

= 그렇다. 채명신 장군은 5.16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면서도 정치권으로 진출하지 않고 군으로 복귀했고 유신개헌에 강력히 반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대장 진급에서 탈락했다.

채 전 사령관은 1949년 육군사관학교(육사 5기)를 졸업하고 이듬해 6·25 전쟁에 소위로 참전해 백골병단을 지휘했고 중대장, 유격대장, 연대장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53년에는 미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했다. 채 장군은 육군 5사단장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60년 5.16 군사쿠데타에 참여해 혁명 5인위원회 멤버로 선임됐으며, 그해 7월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면서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으로 발탁됐다.

1965년에는 주월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에 임명돼 1969년까지 4년 가까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을 지휘했다. 이후 육군 2군사령관을 거쳐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개헌에 반대했고 그해 중장으로 예편했다.

당시 고인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에게 집권연장의 뜻을 보이면서 군부 내의 지지를 이끌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신의(信義)가 정치인의 생명이라며 강하게 반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채 장군은 전역이후에는 스웨덴과 그리스, 브라질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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