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미사에서 강론한 신부에 대해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검찰의 인지수사가 아닌 보수단체의 고발에 의한 피고발자 조사로 시작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 사회 전체가 주목하고 있다.
◈ 결코 낯설지 않은 이 풍경, 유신의 추억
지금 우리 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집권세력과 천주교 사제단과의 충돌은 1970년대 긴급조치 시대와 유사하다.
1970년대 천주교의 시국미사, 시국기도회를 이끌어낸 밑바닥에는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이 자리 잡고 있다.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교회가 무지했고 무능력했다는 자성이 시국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낸 것.
그 이후 1971년 원주교구에서 ‘부정부패 척결 특별미사’가 열리며 사회현실과 현안이 미사 속으로 들어왔고,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이 이어지며 정치와 시국현안이 천주교회의 과제로 등장했다. 결국 1973년 11월 서울에서 천주교 구국기도회’가 열리면서 시국기도회가 시작된다.
그러자 2달 뒤에 긴급조치 1호, 2호가 선포되며 한국 사회는 이른바 긴급조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천주교 지학순 주교의 체포, 구속 사건이 발생하면서 윤공희 대주교의 주례로 첫 시국미사가 열렸다. 1974년 7월의 일이다. 이 사건을 게기로 결성된 것이 지금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며 사제단은 이후의 시국선언, 시국기도회를 주도해간다.
위기를 느낀 유신정권은 민주화 요구를 잠재우기 위해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시국사범은 영장 없이 체포해 1년 이상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강경한 탄압 조치였다.
기독교 민주화 운동권은 이에 맞서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와 천주교·개신교 합동기도회를 열고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다. 명동 선언문이 그전까지의 시국선언과 다른 것은 유신반대를 넘어 유신정권 퇴진까지 요구했다는 점이다. 검찰은 이 사건을 ‘종교행사를 빙자한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11명을 구속했다.
이 사건을 지켜 본 김수환 추기경은 3월 15일 시국기도회 강론에서 신부들에 대한 지지와 염려의 뜻을 밝혔다.
"사건 관련 신부들을 무조건 잘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잘못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 행위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나름대로 신앙적 소신과 양심에서, 더 나아가 보다 밝고 의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애국심에서 한 행동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방법을 탓하더라도 순수한 동기는 탓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의견이 다르다고 사람들을 단죄하여 하느님의 엄한 심판을 자초하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1977년에는 시국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나섰던 천주교 안동교구 사제들의 체포, 부산 교구 사제들의 정보부 연행, 인천 교구 김병상 신부 구속이 이어졌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계속해 시국기도회, 교권수호기도회를 이어갔다.
그러다 벌어진 사건이 1978년 7월 전주에서의 이른바 7.6 사태다. 전주 교구 신부들을 밀착감시하고 서울 시국기도회 참석을 막던 경찰이 신부(박종상 신부)를 폭행한 뒤 길에 내다 버린 것. 경찰은 며칠 뒤 다른 신부를 때리고 수녀의 두건을 강제로 벗기는 폭력을 행사한다.
수녀의 두건은 수녀의 상징이다. 수녀 서원 예식 때 두건을 건네는 중에 "거룩한 수건을 받아 이로서 주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하며 교회에 봉사하기 위하여 온전히 봉헌되었음을 모든 이에게 알리시오"라고 일러준다.
이 때문에 전주 교구 뿐 아니라 전체 천주교인들이 분노했고, 정의구현 사제단이 나서서 당국의 사과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 사태는 경찰국장이 사제단에게 무릎을 꿇고 정중히 사과하며 일단락됐다.
이번 국정원 선거개입 규탄에서 다른 곳도 아닌 그 전주교구 시국미사에서 대통령 퇴진 등 더 앞선 내용의 요구사항들이 제시된 역사적 배경일 수도 있겠다.
◈시대의 아픔은 교회의 아픔이자 과제
한편, 전주 교구 시국 미사 이후 신부의 사회참여, 그리고 사회참여가 정치적 의미를 담을 때 어디까지가 타당하냐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까지는 세속과 교회를 엄격하게 구별하면서 사회정의나 인권에 대해 거리를 두도록 했다. 그러다 1891년 바티칸 교황청에서「노동헌장」(Rerum Novarum)을 발표하며 고통 받는 노동자와 사회현실에 주목하도록 했고, 1965년 '사목헌장'(Gaudium et Spes)에 이르러는 인간과 사회와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시대 인간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가난하고 어떤 식으로든 괴로움을 겪는 이들은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이다 … 그러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교회는 항상 시대의 징표를 면밀히 검토하고 그것을 복음의 빛을 따라 해석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 또한 기본적 인권이나 영혼의 구원이 그러한 판단을 요청하는 때면 언제나,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 질서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까지도 교회는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할 책임이 있다." (사목헌장, 1항, 4항, 42항, 76항)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 이르러서는 보다 분명한 입장을 밝힌다.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구원을 길을 가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부조리와 잘못된 구조를 수수방관하지 말고 함께 고민하며 헤쳐 나가야 한다"고 선언한다.
다만 정치사회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데에 대해 제어하는 것은 사제 본연의 임무에 소홀할 수 있다는 염려 내지는 교회가 정치권력과 충돌하는데 대한 우려가 담겨 있다고 본다. 또 성도들이 여러 정당에 속해 있을 수 있고 정치적 입장과 이해관계가 서로 다를 텐데 자칫 사제들이 특정 정당에 소속되거나 깊이 관여한 채 성도들을 지도할 경우 '교회적 친교'를 해칠 수 있다고 염려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