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원고

고(故) 하태환의 옥중록 《지우지 못할 이야기》
[인터뷰] 책 엮은 김새봄 출판사 대표

원고가 책이 되기까지 걸린 기간 52년. 강산이 다섯 번도 변할 시간이 지나야 책으로 나올 거라고는 원고를 쓴 저자도, 그의 가족도 전혀 생각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저자는 자신의 책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유작이 된 책의 이름은 《지우지 못할 이야기》, 저자는 고 하태환 선생. 이것은 그의 옥중기록이다.

책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던 1961년 5월 16일 아침부터 시작된다. 당시 저자는 이틀 뒤 경찰에 연행된다. 그가 혁신계(진보계열)로 분류되는 사회대중당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혁신계 정치인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테두리 안에서 평화적 통일을 주장하고, 합법적 정치 활동을 펼쳐왔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혁신계 정치인들을 '소급법'을 적용해 투옥, 처형했다.

책에는 헌법을 불구로 만들어버린 '소급법'에 대한 비판과, 군인들로 이루어진 '혁명재판소'의 재판 과정, 저자 본인의 7년에 걸친 옥중 기록, 저자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인터뷰와 옥중 이야기들이 꼼꼼히 기록돼 있다.

교도소에 있던 저자는 1961년부터 집필을 시작, 1968년 초고를 완성했다. 하지만 옥고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병을 얻은 저자는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후 원고는 가족들로부터 소중히 보관되어 오다 2013년에 저자가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이미 고인이 된 저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책으로 나오게 됐다.

책을 엮은 새봄출판사 김새봄 대표에게 52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지우지 못할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 이 책은 오랫동안 찾지 않아 먼지로 뒤덮인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비기(秘記)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찾아 읽는 책은 아니겠지만, 경우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진주가 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1961년 5.16 아침부터 만 7년간 구속되었던 저자의 옥중 기록을 통해 당시의 ‘한국 혁신진영 수난사’를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판결문과 재판 과정을 실명과 정확한 날짜까지 병기해서 기록한 한권의 역사책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책입니다. 이 시대에 대한 이처럼 자세한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은 현재 시중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고 하태환 선생의 친필 원고. (새봄출판사 제공)
▶ 고 하태환 선생은 어떤 사람이었나. 개인의 삶에 대해 알려 달라.

▷ 저자 하태환은 감리교 신학교를 나와 1960년대 이전까지 김해, 마산, 함안 등지에서 교편을 잡아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4.19 이후 활발해지던 혁신정치운동의 중심에 서있었지만, 군사 쿠데타로 인해 젊은 시절 뜻이 꺾여버린 안타까운 지식인 중에 한 분이었습니다. 저자의 ‘자서약전’과 저자 소개는 책에 부록으로 자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제 기억 속에서 저자의 유일한 모습은 그가 임종하던 순간입니다.

▶ 탈고된 지 45년이 지나서야 책으로 나왔다. 이 원고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햇빛을 볼 수 없었나.

▷ 책이 지금에 와서 출간된 이유는 총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저자가 옥고를 치렀던 이른바 ‘소급법’의 내용 때문입니다. 헌법에 유례가 없는 ‘3년 6개월을 소급해서 실시’ 한다고 하여 법률 불소급의 원칙을 깬 ‘소급법’은 더 나아가, “소급법에 의해 처벌한 사실은 이의를 할 수 없다”는 부칙을 삽입해서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재심조차 청구할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52년이 지난 2013년에 와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저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가족들에 의해 소중히 보관되어 오던 원고를 책으로 펴내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옥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저자가 병을 얻으면서 출판 직전까지 갔다가 아쉽게도 출판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동지들은 저자처럼 재기에 실패한 경우도 있고, 이후 군사정부에 의해 사형당하거나 또 다른 옥고를 치러야 했던 경우도 있고, 정치적 변절을 통해 국회의원과 장관까지 올랐던 경우도 있습니다. 저자 또한 병을 얻기 전까지 재기를 위해 노력했지만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혁신계’라 불리던 정치세력의 역사적 소멸입니다. 비록, 현재의 ‘진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때의 혁신계는 중간파(?)라고도 불릴 정도로 좌우가 구분되지 않았던, 우리 역사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세력이었다고 합니다. ‘혁신계’라는 단어가 현재 독자들에게 생소한 이유는, 이 단어가 5.16을 계기로 해서 완전히 소멸되어버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김 대표가 이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나.

▷ 앞에 언급했듯이, 저자의 임종 순간을 지켰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사실, 저자는 저의 외할아버지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병에 걸려 제대로 걷지 못하거나, 말을 하지 못해 간신히 소리만 지르던 모습이 전부였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쓸쓸한 임종이 또 있을까. 그날따라 외할아버지는 평소와는 다른 점잖은 모습으로,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 손자들 곁에서 멀리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이지만,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고 하태환 선생의 '지우지 못할 이야기' 원고. (새봄출판사 제공)
대학에서 시를 전공하고, 한때 소설을 썼던 저는, 외할아버지의 삶을 소설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 생각을 어머니께 말씀드렸는데, 그때 지금의 《지우지 못할 이야기》 원고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만지기만 해도 마른허물처럼 부서지던 원고지를 첫 부분만 읽으면서, 책에 담긴 내용과 문장들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꼭 제가 출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저자의 가족(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왔나.

▷ 경제적으로는 가난하게 살아왔습니다. 저자의 부인(저의 외할머니)은 작고 왜소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그 힘든 시절을 견뎌낸 강건한 분이십니다. 저자의 가족(자녀를 포함)들 또한 현재는 노인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남편(또는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면 자신감에 넘치고 눈에 빛이 나곤 합니다.


▶ 이 책을 내기로 결심했을 때 가족들의 반응. 또 책이 나온 다음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 책이 나온 후, 대전으로 저자의 옛 제자분께 책을 전해드리러 내려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 여사(저자의 부인)께서 집에 이따만한 원고뭉치를 쌓아놓고 책으로 내야 되는데, 하면서 고민하던 모습이 떠오르네. 그런데 그게 벌써 몇 십 년 전 일이구만” 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러니 이 책을 펴내는 것은 가족들의 평생의 과제와 같았습니다.

저자의 아들(저의 외삼촌)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책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눈치였고, 딸(저의 어머니)은 책이 잘 만들어졌다고 반기는 모습이었습니다. 다른 독자들에게도 그와 같이 반가운 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었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독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조금 아쉬운 마음도 있습니다.

▶ 한 개인의 옥중수기라는 것을 넘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당시 혁신 정치인들의 탄압,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 등.

▷ 이 부분은 조금 더 역사와 정치 쪽으로 깊게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12월에 전문가의 역사 강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비전문가로서 조금만 말씀드리자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의 공산주의 이력 때문에, 쿠데타 세력을 공산주의 세력으로 의심하는 미국정부에 보여주기 위하여(매카시즘 또는 레드콤플렉스) 당시 4.19를 기반으로 재결집하던 혁신계 정치인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은 용공세력으로 몰아 구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혁신계 정치인들에게 용공혐의가 없다는 것은 이 책에 700페이지 가까이 조목조목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민주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한 혁신계 정당들에게 ‘용공’ 혐의를 덮어씌울 수 없자 ‘그러한 정을 알면서’라는 애매한 문구로 그들을 처벌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함께 구속되었던 사람들이, 반혁명군인, 자유당 정권의 부정축재자, 정치깡패였습니다. 그것은 사회악을 척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책 내용에는 그들을 다루는 군사정권의 부조리한 모습들이 담겨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몇 년 후, 부정축재와 정치깡패 같은 사회악은 오히려 군사정권 내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교과서나 TV를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주요한 역사적 사건들 이전에 존재했던, 군사정권의 최초의 탄압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혁신진영 수난사’라고 하는 역사기록은 현재 잘 전해지지 않는 것들이라 희소적인 가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책을 엮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엮는 과정에서 에피소드가 있다면.

▷ 원고지에 있는 내용을 일일이 컴퓨터로 옮기는 일은 의외로 힘들었습니다. 이 작업만 두 달이 걸렸습니다. 교정과 교열 작업은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지금 시대에 이런 책이 과연 얼마나 많은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책 내용이 정말 훌륭하다”는 원고 타이핑과 책 편집을 함께했던 다른 직원들의 말이 늘 힘이 되었습니다.

▶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

▷ 얼마 전,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 감독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지지해줄 것 같던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층이 오히려 절반 가까이나 자신의 영화가 극장에서 갑자기 내려지는 일에 동의한다는 의견을 냈다는 것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니, 취업도 어렵고 경제적으로 허덕이는 이러한 각박한 세상에 이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져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묻는 일이 오히려 미안한 일이었다, 더욱이 레드콤플렉스, 에서 자유로웠던 10대에게도 이 영화가 갑자기 상영중지 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전이해준 꼴이 되어버린 것 같아 미안하다, 는 말을 했습니다.

이 책을 출판하기로 결심한 저도 비슷한 마음이었습니다. 이 각박한 세상에 지난 시대의 어두웠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이 과연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책 출간시점부터 지금까지 현재의 정국(?)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이 책이 지금 시대에 가장 필요한 책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진보’라는 것의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책이 바로 《지우지 못할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금의 정국(?)과 똑같은 일들이 52년 전에도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책이 하나의 역사기록, 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비록, 책을 만들면서 좀 더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이나, 서투른 점이 있기도 하지만, 책의 내용만은 독자들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저자의 숭고한 넋이 느껴지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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