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피해자 숫자 적은건 한국전쟁 당시 북한 조사 빠졌기 때문
- 3.1 운동 희생자로 새롭게 밝혀진 분들, 국가유공자 인정받아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00~20:00)
■ 방송일 : 2013년 11월 19일 (화) 오후 6시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박경국 (국가기록원장)
◇ 정관용> 3.1운동 희생자, 관동대지진 피해자, 또 노역징용자 등 일제강점기 당시의 여러 피해자들 명부가 오늘 전격 공개됐습니다. 이게 도쿄 주일한국대사관 이전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문서들이죠. 이 자료를 토대로 일제강점기 당시의 여러 피해에 대해서 우리 정부가 활용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걸로 보이는데 이 자료를 조사 분석한 국가기록원의 박경국 원장 전화해 모십니다. 박 원장님 안녕하세요?
◆ 박경국> 안녕하세요.
◇ 정관용> 모두 몇 권이죠?
◆ 박경국> 총 67권입니다.
◇ 정관용> 67권이고요.
◆ 박경국> 네.
◇ 정관용> 일제, 그러니까 3.1운동 희생자는 몇 권에 몇 명, 이런 식으로 정리해 주시면요.
◆ 박경국> 우선 오늘 저희가 공개한 게 세 가지 종류입니다. 3.1운동 피살자 명부. 한 권에 217매, 630명이 등재가 돼 있고요. 그다음에 관동대지진 시에 피살자 명부 역시 한 권, 109매, 290명이 등재가 돼 있습니다. 그리고 피징용자 명부가 65권에 22만 9781명이 등재가 돼 있습니다. 세 가지 기록입니다.
◇ 정관용> 대부분 피징용자 명부가 제일 많네요.
◆ 박경국> 그렇습니다.
◇ 정관용> 3.1운동 희생자, 관동대지진 희생자는 그동안에 수천명 이상 사망한 걸로 알려졌는데 630명, 290명이면 턱없이 적은 거 아닌가요?
◆ 박경국> 그렇습니다. 좀 적은 인원이 등재가 돼 있는 걸로 확인이 되는데. 그동안 3.1운동의 경우에는 총독부에서 공식 발표한 것은 106만명이 참가해서 553명이 사망한 걸로 기록이 돼 있고,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7509명이 사망했다고 돼 있거든요. 그런데 대략적인 숫자만 이렇게 제시가 됐지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피살이 됐는지 하는 것은 처음 이번에 공개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게 아무래도 그때 조사시점이 6.25 당시이기 때문에 6.25전쟁 중이기 때문에 북한 지역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가 되고 남한 지역만 조사가 됐기 때문에 이 숫자가 적지 않았나 생각이 되고 그다음에 관동대지진 때 피살자의 경우에 290명이 등재가 된 게 확인이 됐는데 당시 우리 임시정부 산하에 독립신문 특파원 보고에 의하면 6661명이 희생이 됐다. 또 독일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1924년 3월에 나온 일본에서의 한국인 대학살 자료는 2만 3058명이 학살된 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인원만 나왔지 구체적으로 김 아무개, 이 아무개가 어떻게 어디에서 죽었는지 하는 것은 발견이 되지 않았습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3.1운동도 관동대지진도 그동안 숫자는 여기저기 언급이 됐지만 구체적인 이름이 나온 건 이번이 최초군요?
◆ 박경국> 그렇습니다.
◇ 정관용> 노역징용자는 명단은 나온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 박경국> 징용자 명부는 그동안 국가기록원에 두 종류의 명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에서 작성했던 왜정시 피징용자 명부에서 20권, 28만 5771명이 등재된 자료가 하나 있고요. 일본 정부에서 작성이 돼서 우리한테 이관됐던 피징용 사망자 연명부에서 총 544권에 48만명, 이렇게 두 자료를 갖고 있는데.
◇ 정관용> 일본정부 자료가 훨씬 숫자가 많네요.
◆ 박경국> 일본에서 이관 받은 것은 상당히 부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창씨개명이 있었잖습니까? 일본 성으로 기록이 돼 있고 해서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인원은 많지만. 그래서 그동안 우리 정부에서 작성된 20권, 28만 5771명을 가지고 그동안 여러 가지 사실관계 확인을 거쳐서 보상절차가 지금 진행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랬는데 이번에 발견이 된 것은 65권에 22만 9781명인데 기존의 명부와 뭐가 차이가 있냐면 성명, 생년월일, 주소 등이 여기에 명시가 돼 있습니다.
◇ 정관용> 기존 자료는 뭐가 있는데요?
◆ 박경국> 기존 자료에는 그렇게 자세한 이름과 나이, 주소, 연행지, 징집기간, 현주소 이렇고 돼 있는데 생년월일이나 주소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어서 성명, 생년월일, 주소 이런 게 기재가 돼 있어서...
◇ 정관용> 알겠습니다. 기존 자료보다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가 훨씬 용이한 그런 자료다, 이 말씀이시군요.
◆ 박경국>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현재 기존에 갖고 있는 건 57년도에서 58년도에 작성된 자료고 이번에 저희가 공개한 건 53년에 작성된 자료입니다.
◇ 정관용> 53년에 누가 작성한 겁니까?
◆ 박경국> 이거는 우리 정부가 내무부에서 각 시도를 통해서 조사된 걸로 그렇게 저희는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이승만 정부 당시에 내무부를 통해 각 시도 자치단체를 통해서 조사해 봐라, 이렇게 해서?
◆ 박경국> 네.
◇ 정관용> 53년이면 한국전쟁 한참일 땐데요. 그렇죠?
◆ 박경국> 그렇습니다. 53년 1월쯤으로 추후에 작성된 걸로 보이는데. 저희가 이 자료를 배경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어떤 배경에 이게 작성이 됐는지 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동안에 국무회의록을 쭉 뒤져보니까 1950년 12월 15일날 제109회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유시로, 그러니까 지시로 내무부에서 이러이러한 자료를 조사해라라고 이렇게 지시한 것이 발견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 지시에 의해서 작성이 된 자료로 저희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그나저나 이게 그런데 왜 일본에 가 있었어요? 주일 한국대사관에 왜 이게 있었던 겁니까?
◆ 박경국> 이게 아시다시피 1952년에, 50년 2월에 1차 한일회담을 했습니다마는 합의에 실패를 합니다. 그리고 53년 4월에 2차 한일회담이 열리게 되는데 그 사이에 조사된 자료로, 그러니까 52년 12월 15일날 자료를 조사해서 지시를 한 걸로 봐서 53년 4월에 2차 한일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성이 된 걸로 저희는 추정을 하고 있고, 그래서 그 근거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 일본대사관으로 보내진 걸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 정관용> 1차 한일회담과 2차 한일회담 사이에, 2차 한일회담 때 이런 사람도 이런 희생을 했으니 예를 들면 배상해라, 이런 걸 하려고 근거가 되는 자료를 만들었다, 이 말이군요.
◆ 박경국> 그렇습니다.
◇ 정관용> 우리 박경국 원장 보시기에 그러면 이 자료를 근거로 해서 우리가 일본에 추가로 배상을 요구하거나 할 수 있는 그런 게 됩니까, 안 됩니까? 일본은 지금까지 모든 요구에 대해서 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다 끝났다, 이 입장만 고수해 왔는데 그걸 뒤집을 만한 근거가 되는 자료가 있나요?
◆ 박경국> 그것은 기왕에 우리 정부 부처에서 맡고 있는 부처에서 저희가 이 기록을 제공하게 되면 그 부처에서 사실관계 확인을 다시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게 6.25 때 작성이 됐고 또 한창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관련되는 자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료를 토대로 해서 관련 자료를 비교해서 하나하나 확정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법에 정한 절차가. 그래서 그 문제는 관계부처에서 구체적으로 작업이 진행될 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그 작업이 진행돼서 사실관계 확인이 된다면 말이죠. 그러면 배상요구 이런 건 할 수 있다고 보세요, 어떻게 보세요?
◆ 박경국> 글쎄, 기록원에서는 기록을 관리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 정관용> 언급하시기가 좀 그렇다.
◆ 박경국> 그건 언급하기가 어렵고요. 다만 이제 대법원에서 지금,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어떻게 판결하느냐에 따라서 또 달라지고 또 여러 가지 국제 관계이기 때문에 복합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될 걸로 생각이 됩니다.
◇ 정관용> 다만 3.1운동 때 희생되신 분들의 명단으로 새롭게 밝혀진 분들 같으면 예를 들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분이 새로 생긴다든지 이런 거는 후속작업이 반드시 있어야 되겠군요.
◆ 박경국> 그렇습니다. 바로 그래서 저희도 사본을 제작을 해서 관련부처에 신속하게 제공을 하고, 그렇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자료 명단 중에서 좀 주목해 봐야 할 이름이나 이런 것도 혹시 발견된 게 있습니까?
◆ 박경국> 네. 천안지역 명부를 이렇게 보면 연번으로 제일 먼저 유관순, 두번째 유중권, 세번째 이 씨,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유관순 열사는 우리 국민 누구나 다 아시는 분이고, 유중권 씨는 부친으로서 91년도에 애국장에 서훈됐고요. 이 씨라고 돼 있는데 같은 주소에. 같은 주소로 봐서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 성함이 이소제 씨거든요. 그래서 그게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가 아닌가, 이렇게 저희는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례들이 앞으로 이제 많이 발견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총 3.1운동과 관련해서 서훈된 분은 총 391명입니다. 저희가 이번에 확인된 것이 이번에 등재돼 있는 인원이 630명이기 때문에 앞으로 추가로 더 확인을 하면 그동안 저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애국지사들이 많이 발견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 정관용> 유관순 열사의 어머님께서도 그 당시 희생당했다라는 것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 박경국> 그렇습니다.
◇ 정관용> 처음 알려지는군요?
◆ 박경국> 명부에는 그냥 '이씨' 해서.
◇ 정관용> 일단은 추정이고요.
◆ 박경국> 여(女), 이렇게 돼 있습니다.
◇ 정관용> 하지만 같은 주소니까?
◆ 박경국> 같은 주소니까.
◇ 정관용>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되겠군요.
◆ 박경국> 그리고 공교롭게도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께서 이소제 여사이기 때문에.
◇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것이 일본에 있는 주일대사관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잖아요.
◆ 박경국> 네.
◇ 정관용> 이것도 그 기록 관리에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 박경국> 저희도 개인적으로 이사를 하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뜻하지 않은 숨은 물건들이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일본 우리 그 주일한국대사관도 오랫동안 사용하던 청사를 이전하는 과정에서 이게 발견이 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그 현장을 보진 못했기 때문에 확실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평상시에 눈에 띄기 어려운 곳에 있지 않았나...
◇ 정관용> 그랬겠죠. 그런데 소재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게 문제죠.
◆ 박경국> 네, 뭐 하여튼, 어쨌든 저희들은 그 기록이 발견됐을 때 이게 그래도 유실되지 않고 저희 국가기록원으로 잘 이관된 것에 안도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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