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8일 오전 10시, 당시 네오위즈 게임즈의 개발팀 파트장이었던 정모(29) 씨는 장장 17여 일간의 야근을 마치고 회사를 나섰다.
회사 셔틀버스를 놓치면 서울 강서구의 집에서 경기 판교에 있는 회사까지는 왕복 5시간이 걸리니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다시피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정 씨는 집으로 돌아가 쉬는 대신 곧바로 사옥 맞은편의 25층 아파트 옥상에 올라 스스로 몸을 던져 숨졌다.
◈ "애인과 크게 다퉜다" vs "화해하고 전셋집까지 마련"
당시 경찰은 정 씨가 연애 문제로 애인과 가족 사이에서 갈등을 빚다가 신변을 비관해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정 씨의 애인이 정 씨와 자주 다투다 정 씨 가족의 집 앞에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등 갈등을 빚어왔기 때문이다.
또 네오위즈 측은 사고가 일어나기 전날 오후에 정 씨의 애인이 회사로 찾아와 정 씨와 크게 다툰 장면이 녹화된 CCTV 영상과 정 씨가 연애 문제로 고민한 심경을 담은 문서 2개를 경찰에 제시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투신하기 전 이미 애인과 화해한 정 씨가 연애 문제로 숨졌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숨지기 바로 전날 정 씨와 애인이 다툰 것은 사실이지만, 곧바로 화해한 뒤 함께 전셋집과 휴대전화를 마련하며 미래를 약속했다는 것.
정 씨의 아버지는 "가족들이 두 사람의 교제를 우려했던 사실은 인정한다"면서도 "아들의 의지가 강해 반대할 마음을 접었고, 두 사람도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계를 유지하기로 마음먹던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유족들은 네오위즈 측이 산업재해 처리를 피하려 업무 스트레스가 아닌 개인 문제 때문에 숨진 것으로 몰고 있는 게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다.
우선 유족들은 정 씨가 회사 앞에서 몸을 던졌는데도 정 씨의 여동생이 경찰서에 도착한 당일 저녁 6시까지 8시간 동안 회사가 아무런 연락을 주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정 씨의 아버지는 "사고 당일 경찰은 그저 아들 일로 조사할 게 있다고만 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겨 저녁 6시에야 여동생 혼자 경찰서에 갔다가 뒤늦게 사고를 수습하기도 바빴다"고 말했다.
특히 "그 사이에 회사측이 아들의 컴퓨터에서 문서 파일을 찾아 경찰에 제출했다"며 "아들이 작성했는지 알 수도 없는 문서가 어느새 유서처럼 취급되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회사가 제출한 문서 중 하나는 "가족과 결별해서라도 여자친구를 지키고 싶다"는 내용일 뿐 아니라 사실관계도 일부 틀려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나머지 하나의 문서도 사고가 있기 20여 일 전 정 씨가 어머니에게 보낸 메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사건을 맡았던 분당경찰서 관계자는 "경찰은 자살과 타살 여부만 가릴 뿐"이라며 "문제의 문서들을 유서로 인정해 증거물로 취급하지는 않았고 참고만 했다"고 설명했다.
◈ 유족 "회사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건가"
현재 유족들은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역시 정 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 중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숨지기 직전에도 평일에만 17여 일을 연달아 야근했을 뿐 아니라, 정 씨가 네오위즈에서 근무한 2년 내내 격무가 반복됐다는 것.
정 씨의 유족 측은 "회사 업무에 대한 책임과 지나친 업무량 때문에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며 "특히 숨지기 전 게임 개발이 잘 진척되지 않아 괴로워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정 씨와 함께 근무했던 한 직원은 "우리는 야근수당도 받지 않고 여러 차례 야근했다"며 "업계 특성상 작업 성과에 따라 곧바로 이직 압박을 받기 때문에 정 씨가 그동안 높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결국 유족들이 성남노동지청에 진정을 넣고 나서야, 네오위즈 측은 유족과 합의해 밀린 시간외수당을 지급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정 씨의 자살을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고 보상금 지급을 부결했다. 이에 유족 측은 지난 9월부터 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정 씨의 아버지는 "연애문제가 자살 원인의 하나일 수도 있지만,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말인지 묻고 싶다"며 "출퇴근 기록 등 관련 자료를 요청해도 회사는 일체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답답해했다.
◈ 네오위즈 "법원이 판단할 것"
이에 대해 네오위즈 측은 "이 사건은 이미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결정된 사안"이라며 "소송이 제기돼 입장을 밝히기 어렵고 다만 법원이 판단할 문제로 보인다"고 말을 아꼈다.
이어 유족이 문제 삼은 두 문서에 대해서는 "경찰이 수사 협조를 요청해 응했을 뿐"이라며 "지급된 회사 컴퓨터의 자료는 회사의 자산에 속해 법적으로 문제 될 일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고 해명했다.
회사 관계자는 "정 씨의 경우 사고가 일어난 지난해에만 8일가량 휴가를 썼다"며 "근무시간이 길었다지만 업계 특성상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달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