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 원조가 잇따르고 있지만 태풍이 들이닥친 지 나흘째인 12일(현지시간)에도 식수와 식량, 의약품 등 필수 물자와 복구 인력이 아직 피해지역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트리나의 세배…필리핀 사상 최악 참사'
인구 22만명의 타클로반은 도시라기보다는 거대한 폐허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상태다.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생존자들은 무너진 집 귀퉁이나 꺾인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밤을 지새고 있다.
일본 오키나와 기지에서 현지로 급파된 미 해병 제3원정여단의 폴 케네디 준장은 헬기를 타고 피해 현장을 둘러본 뒤 "부서지지 않은 건물을 찾기가 어렵다. 이 재난을 묘사할 자신이 없다"는 말로 충격을 표현했다.
이번 태풍으로 이날 현재까지 숨진 것으로 확인된 인원은 1천744명이고 부상자는 2천487명이라고 AP통신은 전했다.
이재민은 66만명에 이른다. 필리핀 당국은 41개 지역에서 필리핀 인구의 10%에 가까운 970만명이 피해를 봤다고 추산했다.
하지만 사망자 집계가 걸음마 단계여서 복구작업이 시작되면 희생자 수는 크게 늘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 적십자사 그웬돌린 팡 사무총장은 "미국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엄청난 피해를 봤는데 우리는 그 세배 이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개탄했다.
◇갈증·허기·시신부패…'2차 피해' 우려
생존자들은 갈증과 허기, 위생 악화라는 또 다른 위험에 직면해 있다.
국제 구호단체와 필리핀 당국이 인력과 물자를 재난 지역에 급파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 규모에 비해 도움의 손길은 아직 미미하다.
생존자들은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지만 먹을 물과 식량은 턱없이 부족하다. 시급한 부상자 치료에 쓰일 의약품도 조달하기 어렵다.
간신히 붕괴를 면한 병원 몇 곳은 몰려드는 환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돌려보냈고, 군이 타클라반 공항에서 운영하는 임시 치료소도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허덕이고 있다.
안토니오 타마요 대위는 "약품이 필요하다. 파상풍약도 다 떨어져 주사를 놓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사망자 수습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인력도 부족하고 시신을 보관할 가방이나 보관장비를 가동할 전력도 없기 때문이다.
적십자사는 시신 보관용 가방 1만개를 주문했지만 언제 도착할 지 기약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 거리와 건물 잔해, 물 속에 방치된 시신이 부패하고 있어 2차 감염 우려를 낳고 있다.
벨기에 국경없는의사회(MSF) 대표 멜라니 니콜라이는 CNN에 "부상 악화나 감염으로 사망자 수가 더 늘어날 공산이 크다"고 2차 피해를 걱정했다.
◇약탈·탈옥 '아비규환'…생존자들 '지옥서 나가야'
치안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일부 생존자들이 군·경찰력의 공백을 틈타 가정집에까지 침입하고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혼란 속에 탈옥 사건도 발생했다. 피해지역의 한 교도소에서 건물이 무너진 틈을 타 재소자들이 탈출했다고 AP통신아 보도했다.
타클로반 지역 군 부책임자인 비르길리오 에스피넬리 육군 준장은 "(여기서 빠져나간다고 해도) 그들이 어디로 가서 뭘 먹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교도소 밖의 상황이 그만큼 나쁘다는 얘기다.
일반 생존자들도 섬을 탈출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12일 새벽 타클로반 공항에 C-130 수송기 두 대가 착륙하자 공항 밖에 진을 치던 3천여명이 부서진 철조망을 넘어 활주로로 몰려들어 또 다른 생지옥을 연출했다.
캐롤 맘파스(48)는 열이 펄펄 끓는 아들을 안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아무것도 남은게 없다. 집도 돈도 여권도 다 없어졌다. 식량과 물은 어디에 있나. 왜 군인들은 시신을 치우지 않나"라며 울부짖었다.
운 좋게 아내와 어린 아들·딸을 수송기에 태워보낸 한 40대 트럭운전사는 "물도 식량도 없다. 사람들은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상점을 약탈하고 있지만 (당국은) 통제력을 잃었다"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