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과거의 입장에서 크게 진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법부 판단과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며 사법부에 부담을 주는 듯한 발언을 해 새로운 논란의 빌미만 던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은 31일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 인사말에서 "개인적으로 의혹 살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국가기관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 의혹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국민들께 정확히 밝히고 책임을 물을 것이 있다면 물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는 사법부의 판단과 수사결과가 명확하고 국민들께 의혹을 남기지 않도록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맡고 있는 분들이 그렇게 하시리라 믿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박 대통령은 이어 "사법부의 독립과 판단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바로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 사법부의 판단을 정치권이 미리 재단하고 정치적인 의도로 끌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법부의 판단과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국가기관 개입 의혹을 국민들께 정확히 밝히고 책임을 물을 것이 있다면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한 부분은 지금까지의 발언에 비해 진전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박 대통령의 발언을 꼼꼼히 살펴보면 "개인적으로 의혹 살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법부의 판단과 결과를 기다려야" 등의 전제가 붙어있다. 이는 잘못이 없는데도 야당이나 시민단체, 언론 등에서 문제가 있다고 하니까 문제가 드러난다면 책임을 묻겠다는 소극적이고 방관자적인 태도다.
박 대통령과 여당인 새누리당이 강조하는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고 존중'해야 한다는 언급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고 가장 원론적인 것이지만 이 발언의 근저에는 복잡한 계산이 깔려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법부의 제대로 된 판단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대로 된 검찰의 수사와 공소제기가 있어야 한다. 적당히 수사하고 적당히 재판에 회부한다면 법원으로서는 제대로 판단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엄정한 판결을 하기 어려워진다.
재판을 뚝심 있게 밀고나가던 윤석열 특별수사팀장도 사실상 쫓아냈다. 윤석열 팀장 후임에는 TK출신의 공안통을 임명했다.
이렇게 되면 사법부의 판단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할 수 밖에 없다.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못하게 하고 재판과정에서도 적당하게 공소유지를 한다면 법원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이 '구두 선'에 불과하지 않도록 하기위해서는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을 제대로 밝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그건 사법부의 몫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의 몫이다.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을 임명 4개월여 만에 찍어내고 수사팀장도 쫓아내면서 정쟁을 중단하고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결론은 예견됐으니 조용히 입 닥치고 기다리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다고 비판해도 반박할 말이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특히 여당인 새누리당이 검찰의 수사와 관련해 댓글이 몇 개이니 기소된 5만5천여 건 가운데 1만5천여 건은 선거와 무관하다느니 하면서 연일 수사팀을 공격하면서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라고 하는 건 사법부의 판단에 영향을 행사하겠다는 의도는 아닌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도 사법부의 판단과 관련해 묘한 뉘앙스를 남기는 발언을 했다. "저는 사법부의 판단과 수사결과가 명확하고 국민들께 의혹을 남기지 않도록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맡고 있는 분들이 그렇게 하시리라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원론적인 언급처럼 보이지만 사법부의 판단과 관련해 '국민들께 의혹이 남기지 않도록 나와야 한다'는 건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다.
청와대가 감사원장에 현직 법원장을 내정한 것도 사법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는 아닌지 의심을 사는 상황에서 사법부 판단의 '가이드라인'으로 여길 수 있는 발언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박 대통령의 언급이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사법부의 판단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기 전에 제대로 된 수사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모든 의혹을 낱낱이 밝히라고 하면 된다. 그리고 국가정보원은 메인서버에 대한 압수수색을 하도록 협조하고 관련된 직원들의 소환에 적극 응하도록 해야 한다.
지금 드러난 인터넷 댓글이나 트위터에서의 글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문제이다. 청와대와 국정원 새누리당만 못 보거나 안보거나 할 따름인 것이다.
박 대통령이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의 회동에서 "댓글 때문에 당선됐다는 거냐"고 반박했다는 건 사실로 알려져 있다. 청와대도 박 대통령이 그런 취지의 언급을 했다고 시인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정원의 댓글은 대선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했느냐? 와 당락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국가기관이 불법으로 선거에 개입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국정원뿐 아니라 국가보훈처와 노동부 통일부 산하기관들의 불법 선거운동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이의 연장선상이다. 박 대통령은 이 간극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풀리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앞으로 정부는 모든 선거에서 국가 기관은 물론이고 공무원 단체나 개별 공무원이 혹시라도 정치적 중립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엄정히 지켜나갈 것입니다"라고 천명했는데 이 발언이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미 벌어진 불법에 대해 사실을 밝혀내고 그에 맞는 책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 박 대통령의 발언이 신뢰를 갖게 되고 야당도 거리에 나설 명분을 잃게 되는 것이다. 민생을 강조하면서 야당을 압박만 할 것이 아니라 박 대통령이 국가기관들의 불법적인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 만큼 '철저하게 밝혀서 엄중히 책임을 물어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방관자의 입장에서 한 발 빼는 듯한 발언은 논란을 키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