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5일 새벽 2시15분. 한계령 휴게소에는 어디서 찾아왔는지 각양각색의 등산복을 차려입은 등산객 이삼백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야심한 시각임에도 능선을 넘어가는 도로엔 경찰관이 배치돼 호루라기를 불며 교통정리를 하고 있을 정도였다.
등산객을 태운 관광버스는 계속 올라오고 차에서 내린 산객들은 한계령 등산로 입구에 줄을 서기 시작한다. 굳게 닫힌 철문이 열리지 않자 일부 성급한 등산객들은 문을 넘어 계단길을 오르기도 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큰 소리로 "조금만 기다리면 등산로 출입문을 열어줄테니 빨리 내려가세요. 내려가지 않으면 정각 3시에 개방하겠습니다"라며 엄포를 놓는다. 등산객들은 내려가는 척하면서도 그대로 주저앉는다. 이처럼 부지런한 국민이 지구 어디에 또 있을까. 산에 오르자고 잠 한숨 안자고 달려와 국립공원공단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세계 어디에 있을까. 해외토픽감일 것이다.
한계령의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수런대지만, 등산객들은 안중에도 없이 길이 열리기만 학수고대하며 담소를 나눈다. 그야말로 별이 쏟아지는 하늘이 얼마만인가. 근 30년전 철책 근무를 서던 강원도 화천군 최전방의 별밤 그대로다. 힘들었던 군 생활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건 덤이다. 강원도를 향해 소변도 보지 않겠다던 전역 당시의 다짐은 온 데 간 데 없다. 강원의 산을 자주 찾는 걸 보면 '인생이란 장담을 하고 살아선 곤란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쓸 데 없는 상념에 젖은 산객의 뒤통수를 치려는 듯 한계령 등산로의 문이 갑자기 열린다. 새벽 2시 45분. 정해진 시간보다 15분 일찍 개방됐다. 수백 명 등산객들의 성화를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계령의 등산로는 초장부터 고도를 높이려는 듯 쉼 없는 오름길이 계속된다. 땀이 겉옷까지 흥건히 적시다 못해 가슴선과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것 같다. 좀 추울 것으로 예상해 입었던 등산용 외투를 벗고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모르는 오름의 기세와 씨름한다.
약간의 내림길이 나오더니 오름길로 변하고, 이런 오르막과 내리막을 여러 차례 반복하더니 서북능선 삼거리에 도착한다. 한계령에서 2.3km. 좌측으로 가면 귀때기청봉이고 우측은 대청봉으로 가는 길이다. 산객은 당연히 대청봉을 향해 속도를 낸다.
서북능 삼거리에서 끝청봉, 중청, 대청봉까지는 그렇게 가파른 오르막길이 없지만 그래도 산은 산인지라 숨을 거칠게 몰아쉬게 하는 오름길이 꽤 있다. 일부 너덜지대도 있고 길이 안보여 목소리를 키워 주변에 누가 없느냐고 적막을 깨뜨려 보지만 사위는 고요하다.
그 많던 등산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등산 속도에 따라 서북능선 등산로에 다 흩어졌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칠흙같이 어두운 밤인지라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는 없지만 어느 능선에 올라 뒤를 돌아보니 랜턴 불빛이 군데군데 보인다.
나무가 둥글게 구부러진 끝청 입구의 상징물에서부터 끝청봉까지는 꽤나 된비알성 오르막이다. 잠을 자지 못하고 맨 선두를 따라가려다 보니 역시 무리였던지 지쳐오기 시작한다. 다리도 무겁고 힘들다.
얼마전 정신적 육체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개인사가 있었다지만 '그래도 이럴 리 없는데' 하며 대청봉에 도전한다. 이런 체력으로 '악명 높은' 공룡능선을 종주할 수 있을지 슬며시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날이 새면서 중청대피소와 대청봉이 어렴풋이 눈앞에 나타난다. 대청봉을 오르는 등산객들의 헤드랜턴 불빛이 줄지어 반짝거리는 걸 볼 때 대청봉은 이미 초만원임을 짐작한다.
대청봉. 설악산의 최고봉(1708m)이다. 동해 바다부터 한계령. 오색 계곡, 흘림골, 점봉산, 귀때기청봉, 중청봉, 공룡능선, 저 멀리 향로봉, 속초시, 화채봉 등 사방을 조망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눈으로 파노라마를 찍은 뒤 대청봉 정상석 사진을 담으려고 하니 10분을 기다려도 도무지 비켜주질 않는다. 인증 사진은 접고 어렵사리 대청봉을 스마트폰에 담는다.
어디에서 이 이른 시간에 등산객들이 나타났는지, 희운각대피소를 향하는 길이 더디기만 하다. 내려가는 등산객들과 중청대피소로 오르는 등산객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곳곳에서 지체된다.
희운각대피소에서 소청까지의 오르막은 그야말로 악명 높다. 15년전쯤 시종 비를 맞으며 오르면서도 참으로 힘든 구간임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림길도 그에 못지 않았다.
50대 후반의 한 등산객과 "설악산을 매년 다니다간 무릎이 남아나지 않겠다"는 등의 대화를 나눴다. 이렇게 가파른 돌계단과 철계단, 나무계단을 수도 없이 밟으며 내려와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희운각 대피소 지붕이 보이자 안도의 한숨과 함께 "어휴! 이런 지겨운 내리막길"이란 말이 절로 나왔다.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설악의 중심 능선이자, 내설악의 가야동 계곡과 용아장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늘과 기암괴석, 나무와 단풍이 어우러지는 절경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등산화 끈을 다시 조이고 배낭을 몸에 꽉 맞게 조절한 뒤 신선대 암봉 오름길에 도전한다.
사방을 둘러보노라니 대청봉과 중청, 그 산세가 희운각 대피소로 내리꽂는 내리막과 가야동 계곡의 시작, 용아장성의 험준한 산세, 멀리 귀때기청봉이 조망된다. 이래서 힘든 줄 알면서도 공룡능선을 찾는구나 싶다.
동양화 얘기가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중국의 황산에 가보면 우리가 그림으로 봐온 멋진 산수화가 그곳을 그린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금강산과 설악산보다 빼어난 산세라고 아니하기도 힘들다.
그렇지만 황산에 없는 것이 있다. 산과 기암괴석, 사람이 한데 어우러지지 않았다. 암벽을 깍아 콘크리트 계단을 만들고 산 정상까지 대형 케이블카를 연결해 돈벌이를 노린 인간의 탐욕이 찌들어 있다. 자연미와 인간미가 결여돼 있다는 얘기다.
우리의 설악산은 기암괴석과 암봉을 연결하는 등로가 또렷하다. 그 사이사이를 인간이 오르내리면서, 벗 삼고 감탄하며 자연과 하나가 된다. 한국의 자연이 모두 그러하듯 설악산 공룡능선의 미학도 여기에 있다.
공룡능선의 대표 봉우리는 1275봉과 나한봉이다. 그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는 표현으로 부족해 깍아지른 듯 험하고 위태롭다. 곳곳에 밧줄이나 쇠줄을 잡고 오르내리는 유격전 코스가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다. 그래도 못 오를 정도까지는 아니므로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특히 비선대 암벽 등반하는 장소에서부터 금강굴까지의 700m 구간은 거의 직벽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름이 심하다. 등산객들의 거친 숨소리가 안타까움을 느끼게 할 정도다. 내리막임에도 땀이 비 오듯하니 쉽지 않은 등산로다.
하지만 신은 공평하다. 그 중간에 비경을 숨겨놨으니 말이다. 아래의 사진을 보시라. 마등령에서 비선대 등로 증간쯤에 대청봉과 화채 능선이 한 눈에 조망되고 공룡능선의 뒷 기암괴석이 찬란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70~80년대 고등학교 수학여행지로 유명했던 곳이자 설악산을 찾는 이들이 가장 많이 오는 곳이 바로 비선대이다. 주말인 10월 5일에도 비선대 탐방안내소 다리가 출렁거릴 정도로 사람이 많다.
한국 여대생과 미국 대학생들까지 뒤섞여 국어와 영어가 한꺼번에 넘실댄다. 비선대에서 탐방안내소까지 3.2km 구간에는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고 배낭을 짊어지거나 가벼운 행락객 차림을 한 사람들로 넘친다.
세계적인 아웃도어 제품 사장들이 이러한 광경을 본다면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고마울까. 웬만한 유명산과 대도시 근교의 산에는 갓 물들기 시작한 단풍만큼이나 등산복으로 울긋불긋할 것이다. 역시 해외토픽감이 아닐 수 없다.
이날도 감사함 속에 시작한 산행은 한계령에서 대청봉, 공룡능선, 마등령, 비선대를 거치며 22km로 마침표를 찍었다. 식사와 휴식 등을 포함해 소요 시간은 11시간 30분가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