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절에 영업하면서 '정상영업'? 늘어난 매장 챙기느라 가매출만 잔뜩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앞에 때아닌 차례상이 펼쳐진 건 연휴 직전인 지난 16일.
추석 명절에도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유통업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날 '한풀이'를 벌였다.
민주노총 산하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조는 "롯데백화점 김포공항점 등 일부 점포들이 오는 추석 연휴에 당일 하루만 휴점한다"며 "하루 만에 뭘 쉬라는 거냐. 롯데 신격호 회장이 하루 만에 고향에 다녀와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통업계 노동자 윤모(52·여) 씨는 "서로 돌아가며 눈치껏 하루 쉴 틈을 내도 시댁부터 가야 한다"며 "간신히 찾아가도 명절 준비는 하지 않고 눈도장만 찍는 며느리를 반기는 시댁은 없다"고 털어놨다.
며느리들의 돌림병인 '명절 스트레스'는 윤 씨도 피해가지 않는다. 윤 씨는 마트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이지만, 가정에 돌아가면 여느 어머니이자 며느리일 뿐이다.
명절이 되면 노동강도는 배가 넘는다. 윤 씨는 "정규직 등 다른 직원이 쉬면 남는 직원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매장을 관리해야 한다"며 "실적 압박은 여전해서 추석 3일 사이에 1500여만원까지 가매출을 낸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의 전수찬 이마트노조위원장은 "매월 이틀씩 쉬는 의무휴업제가 생기자 오히려 쉴 것 다 쉬었으니 연휴는 일하라며 압박하는 게 현장 분위기"라며 "명절마다 '정상영업한다'는 현수막을 걸어놓는데 전 국민이 쉬는 명절에 영업하는 건 '비정상영업'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어 "전에 근무하던 지점에서 평소 600여 명이 근무했는데 명절에는 손님이 더 늘어나는데도 100여 명만 남아 일하기 때문에 노동강도가 엄청났다"며 "휴가를 떠난 정규직이 명절상여금으로 150만원가량 챙길 때 정작 남아서 일하는 비정규직은 60만원도 받기 어렵다"고 성토했다.
◈ 정해진 만큼 일하지 않으면 월급 깎이는 택시기사
한 택시회사에서 일하는 기사 정모(59·여) 씨도 추석 연휴 닷새 내내 운전대를 놓을 수 없다.
입사할 때 읽을 것도 없다며 빨리 서명하라던 근로계약서가 화근이었다. 알고 보니 매월 26일씩 일하지 않으면 쉬는 날만큼 월급을 깎겠다는 내용이었다. 휴일 수당은 꿈도 꿀 수 없다.
어차피 계약서 내용을 알았더라도 별수 없었을 것이다. 일찍 남편을 사별하고 홀로 아들을 키운 정 씨는 "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굶어죽지야 않겠지만, 아들에게 부담을 주느니 어떻게든 일하는 게 낫다"며 웃었다.
더구나 이달 초 몸이 아파 이틀을 쉬었기 때문에 이번 추석 내내 일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일해도 받는 월급이라고는 26일 기준으로 80여만원. 여기에서 세금을 떼면 70만원 수준이다.
정 씨는 "내가 회사에 가져다주는 돈을 계산해보면 못해도 300만~400만 원인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며 "손님 한 명 못 태워도 차 놀려서 매일 13만원씩 떼이느니 5만원씩 회사에 내고 일하는 게 낫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정 씨는 남들이 다 쉬는 명절에 일하는 자신 때문에 부모 고생시키는 아들로 비쳐질까 걱정이다. "명절에 운전하면 손님들이 '저 여편네는 가정도 없나, 명절에 나와 일한다'고 욕할까 창피하다"는 것.
하지만 정 씨는 이내 "집에서 쉬어서 뭐하겠나. 요즘 예순 넘어서도 일하는 건 기본"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 추석 잊은 신림동 고시촌…"자취방 들어가면 홀로 남겨진 것 같아"
김모(26) 씨는 행정고시 합격을 목표로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입촌'한 지 이제 1년 반이 지난 고시생이다.
김 씨는 이번 추석에도 함께 자취하는 친동생만 충남 고향집에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고시촌에 들어온 뒤로 명절은 '5급 공무원의 사치'라고 생각하기로 작정했다.
추석에 남아도 딱히 공부를 많이 할 것 같지는 않다. 학원 수업은 이미 작년에 들었던 내용이고, 독서실은 문을 닫으니 자취방에서 혼자 공부해야 한다.
하지만 함께 공부하는 고시생들과 얘기해보니 너도나도 고시촌에 남는다는 얘기에 괜스레 불안하기만 하다. 더구나 집안 어른들을 만나 이런저런 걱정을 들을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지난 설날에도 도저히 집에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2월 초에 치른 1차 시험 결과는 보지 않아도 탈락인 듯했다. 첫 시험이니 부족한 게 당연하다고 애써 위로했지만 조급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졸업하자마자 들어간 직장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사표를 낼 때만 해도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취방에 돌아오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아 우울하다. 설날을 홀로 보내던 김 씨는 일주일 동안 자취방에 앓아누웠다.
김 씨는 "부모님은 공부 때문에 못 내려간다고 말씀드리니 이해해주셨다"면서도 "함께 계시는 조부모님께서 아쉬워하셔서 지금도 마음이 무겁다"고 털어놨다.
이어 "나이가 20대 후반이 돼가는데 아직도 집에서 돈을 받아 쓰는 형편이라 명절이 되니 오히려 속이 상한다"며 "고향도, 가족도 보고 싶지만 참아야지 별수 없지 않느냐"고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지만, 이들에겐 이번 연휴가 한가위 같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