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8년 발생한 이인좌의 난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삼남 일대가 모두 장악됐고, 난에 참가한 사람만도 20만명에 이르렀다. 실로 왕권을 흔들만한 정변이었다.
난은 어렵게 평정됐지만, 탕평책을 통해 국정을 안정시키고, 백성의 어려움을 돌보려했던 영조로서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난이 평정되고 이인좌를 처형한 뒤, 편전이었던 선정전에서 상참(常參)이 열렸다. 상참은 임금과 3품이상의 당상관들만 참여하는 실질적인 어전회의다.
편당(偏黨)하는 무신들의 머리를 모조리 베어 궐문에 걸겠다며 격분한 영조가 일갈했다. 임금의 기세에 눌린 대신들은 부복한 채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불호령이 내릴 것 같았던 영조의 얼굴이 펴지면서 박문수의 말이 옳다며, 발언을 거둬들였다. 노론이 득세했던 영조시대에 소론 출신으로 상참에 참여할 정도의 직위에 오른 박문수는 암행어사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영조와 논쟁을 잘하고, 논리적으로 설득을 잘해 왕이 옳은 결정을 하도록 도운 충직한 신하였다.
소론 출신임에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몫을 해내,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객고를 푼다는 말이 생긴건 암행어사때문?
암행어사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박문수이지만, 박문수가 어사로 활동한 것은 불과 1년정도 밖에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박문수의 설화는 무려 200여개가 넘는다.
박문수 설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지역은 무주 구천동인데, 예로부터 ‘무·진·장’이라고 해서 ‘무주,진안,장수’는 첩첩산중의 외진 곳으로 중앙권력이 미치지 못해, 지방토호의 세력이 유난히 강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지방관료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지방으로 파견한 암행어사는 모두 7백여명으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박문수처럼 암행어사직을 충실히 수행한 어사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관찰사나 지방 수령들은 암행어사가 파견됐다는 소식이 들리면, 길목은 물론이고 주점, 객관까지 탐문하기 바빴다. 부정부패가 심한 고을의 수령들은 더 혈안이 돼 찾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강고한 의지와 책임감이 없는 어사라면 이같은 수령들의 뇌물공세에 넘어가기 쉬웠을 것이다. 심지어 기생들의 수청을 넘어, 향처(鄕妻), 요즘말로 하자면 현지처를 얻는 어사도 있었다고 한다.
암행어사를 포함해, 중앙관원들이 지방으로 출장을 가면 현지 수령들이 관기를 동원해 성접대에 나서기도 했다. ‘객고(客苦)를 푼다’는 말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선정전은 경복궁의 사정전과 같이 임금의 공식 집무실이다. 보물 814호로 지정돼있다. 용도가 중요해서인지 다른 전각에서 사용되는 기와보다 훨씬 비싼 청기와로 지붕이 덮여 있다.
창덕궁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집이다. 지금의 선정전은 인조 25년에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 세웠던 인경궁의 광전전을 헐어다가 중건한 건축물이다.
선정전은 조선 최고의 강한 여성으로 손꼽히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영,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선정전은 후기 조선의 융성을 이룩한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영조는 누구보다 백성을 삶을 살피려했던 임금이었다. 천한 신분의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궐밖에서 10여년 이상을 살아 백성들의 삶을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와 박문수의 만남은 조선후기 민심과 국정이 안정된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선정전을 들여다 보면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토론을 벌이던 임금과 강직한 신하의 모습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