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씨 일가는 애초의 비자금을 종잣돈 삼아 미납 추징금을 훨씬 뛰어넘는 재산을 증식한 것으로 추정된다. 1조원 안팎일 거라는 관측도 있다. 전씨 일가 입장에서는 턱밑까지 쫓아온 검찰 수사의 속도와 강약을 조절하고 전국민의 비난 여론을 어느 정도 무마하는 추징금 완납이 '남는 장사'가 될 수 있다.
이런 모순은 과태료나 벌금과 달리 추징금은 체납해도 아무런 제재가 없기 때문이다. 불법 주정차 등으로 인한 과태료를 내지 않을 경우 5%의 가산금에 매달 1.2%의 중가산금이 최대 77%까지 붙는다.
형법상 벌금은 판결이 확정된 날부터 30일 안에 내야 한다. 납입하지 않으면 노역장에 유치될 수도 있다.
민사소송에도 이자 개념이 있다. 패소하고도 손해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을 경우 연 20%의 지연손해금이 붙는다. 이자율이 시중금리보다 훨씬 높은 이유는 지연에 따른 당사자의 손해를 보전하고 분쟁을 되도록 빨리 해결하기 위해서다.
전씨의 추징금 2천205억원에 적용해 보면 확정판결을 받은 1997년 4월17일부터 이날까지 이자는 7천234억원이다.
최소한 물가상승률이라도 적용해 더 받아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다. 1997∼2012년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어림잡아 68%에 달한다.
전씨 일가는 추징금을 내지 않아도 별다른 제재가 없는 법의 허점을 16년간 악용해왔다. 강제집행을 피해 수백만원을 자진 납부하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일가가 분담해 밀린 추징금을 완납하겠다고 해도 여론이 그다지 좋지 않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추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검찰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국민감정은 추징금을 계속 미룬 전씨를 비난할 수 있지만 재산을 조기에 찾아내서 환수하는 일은 국가의 몫"이라고 말했다.
이런 지적 때문에 추징금을 고의로 내지 않으면 노역장에 유치하는 방안이 한때 검토됐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2천205억원의 추징금 자체가 전씨 비자금의 일부일 뿐이라는 데 있다. 이 추징금은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기업 총수들로부터 받은 돈 가운데 뇌물로 인정된 액수다.
전씨는 1996년 2월 열린 비자금 사건 첫 공판에서 "재임중 모두 7천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그러면서 대부분 '통치자금'으로 써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재판 당시 전씨가 은닉한 재산을 2천억원 이상으로 추정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김종보 변호사는 "16년 동안 버티다가 추징금 완납 계획과 사과문으로 죗값을 다 치렀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며 "추징금의 엄정한 집행을 위해 이자를 가산하는 방식의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