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4년 봄. 강화 갯가에서 게를 잡던 소년 이원범이 느닷없이 한양으로 불려 올라왔다. ‘봉영의식’이 열리고, 생전 입어보지 못했던 비단옷이 그에 몸에 둘러졌다. ‘덕원군’이라는 듣도 보던 못한 호칭이 내려졌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9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그는 임금이 됐다. 그의 나의 열 아홉. 조선의 25대왕 철종이다.
철종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고, 정조의 이복동생 은원군의 손자다. 철종의 할아버지 은원군은 정조때 홍국영과 모반을 일으켰다는 혐의를 받고 강화로 유배됐다. 거기서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처형을 당했다.
결국 천애고아가 된 이원범은 3대에 걸친 지난한 탄압 끝에 적통을 이어받은 왕족에서 초라한 강화 촌부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선말 정조가 사망한 이후 왕권이 약해진 틈을 타 외척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정조가 승하하자 순조가 즉위하면서, 외척이었던 경주 김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됐다.
순조가 경주 김씨의 세도정치를 제거하자, 이번에는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의 안동 김씨 문중이 세력을 잡고, 장장 60년에 걸쳐 국정을 주물렀다. 자신들의 손아귀에 쥐고 흔들 왕을 찾던 안동 김씨 가문은 수소문 끝에 강화도에서 천둥벌거숭이 같은 한 소년을 찾아낸 것이다.
왕권이 제대로 세워질리 만무했다. 3년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철종의 친정이 시작됐다. 강화에서 어렵게 자란 철종 이원범은 누구보다 백성들의 고통을 잘 이해하는 왕이었다. 나름대로 애민정책을 펴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관서지방의 기근이 계속되자 선혜청을 통해 구휼에 나섰고, 영남지역에 수재가 나자 내탕금, 즉 왕의 개인 재산으로 이재민을 돕는등 빈민 구호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임금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막아낼 힘이 없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민초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자신의 한계를 실감한 철종은 술과 여색에 빠져 살다, 결국 재위 14년만에 33살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왕의 즉위식은 화려하기 이를데가 없다. 문무백관이 머리를 조아리는 가운데,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월대 위의 높은 전에 올라 하례를 받는 모습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 왕의 즉위식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선대 왕이 승하하고 상중 엿새만에 치러지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즉위할 왕은 상복을 입고 통곡하고 있는 와중에 잠시 면복으로 갈아입고 즉위식을 한 후 다시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렀다. 따라서 즉위식은 기쁜 행사가 아니라 눈물바다를 이룬 슬픈 행사였다.
특히 유교적 전통이 국가통치의 이념이었던 조선에서 상례는 가장 중요한 의식 가운데 하나였다. 부모의 상은 신분에 관계없이 3년상을 했다. 3년이 기준이 되는 이유는 내가 태어났을 때 온전히 나를 돌봐준 3년을 되갚는 뜻이라고 한다. 이런 조선에서 상중의 즉위식이 화려했을리 만무하다.
따라서 어정쩡한 사왕은 왕의 어좌 근처인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인정문에서 왕위에 오른 임금은 8명이나 된다. 연산군,효종,현종,숙종,영조,순조,철종,고종등이다.
조선조 왕의 즉위식은 생각보다 초라했고, 오히려 슬픈 의식이었다.
인정문과 인정전의 용마루를 자세히 보면 다른 궁궐의 전각과는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정전에는 3개, 인정문에는 5개의 꽃무늬가 있다. 오얏꽃 문양. 바로 이화(李花)다.
이화여대의 이화(梨花), 즉 배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인정문에 새겨진 꽃은 이씨 왕조의 이(李), 오얏나무 리(李)를 쓴다. 즉 이씨의 왕조, 조선 왕조를 뜻한다.
그런데 오얏꽃 문양이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대한제국때부터다. 왕국에서 제국으로 나라의 국격이 일종의 ‘승격’을 하면서 문양을 사용한 것인데, 일부에서는 일제가 조선왕실이 일개 왕의 가문 즉 이씨왕조로 격하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것은 1904년이전의 인정문 사진에는 오얏꽃 무늬가 없었는데, 을사늑약이후 나타나기 시작했고, 고종과 순종이 거의 감금되다시피한 창덕궁과 덕수궁에만 이 문양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또한 대한제국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왕조의 이름 앞에 성씨를 붙이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구한말부터 이씨왕조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결국 일제가 조선왕조를 격하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일본 혹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의미가 은연중 포함되는 말이다.
따라서 ‘이조’라는 말보다는 ‘조선’이라는 말이 격에 맞는 말이다. ‘이조백자’는 ‘조선백자’로 써야 옳다. 5백년넘게 내려오던 왕국이 일개 한 가문의 세도정치로 문란해지고, 그로 인해 약화된 국력으로 외세를 막을 수 없게되면서, 결국 주권을 뺏기게 된 조선의 아픈 역사가 이 꽃문양에 아로새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