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들이 여러 정황을 내세워 의문의 죽음에 감춰진 진실을 밝혀달라고 애원했지만 경찰은 끝내 단순 교통 사망사로 결론 내렸다.
◈ 경찰, "그건 처녀 아닌 아줌마 팬티"
정은희(당시 18세) 양이 대구 달서구 구마고속도로 중앙분리대 옆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다음날인 1998년 10월 18일.
정양의 동아리 친구 2명은 사망 현장에서 수십미터 떨어진 곳에서 정양의 것으로 보이는 거들과 팬티를 찾아냈다.
정양의 쌍둥이 동생이 "속옷세트를 한 장씩 나눠 가진 팬티로 언니의 것이 맞다"고 확인해줬다.
교통사고인줄만 알았던 유족들은 영안실을 찾아 정양 시신에 팬티와 브래지어가 착용돼 있지 않은 점을 확인했다.
발견 당시 속옷이 벗겨져 있었고, 사고 현장 주변에서 속옷이 발견된 점을 들어 유족들은 성범죄 개입 가능성을 제기하며 팬티 감정을 요구했다.
어처구니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당시 달서경찰서장은 "발견된 팬티는 축 늘어졌고 색깔이 바랜 것으로 봐서 처녀(정은희양)의 것이 아니고 아줌마 팬티인 것 같다"며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거듭되는 요구에 "정양의 것이 맞는 것 같지만 가방 속에 들어있던 거들과 팬티가 교통사고 충격으로 쏟아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을 바꿨다.
그러나 시신에 속옷이 벗겨져 있는 이유는 설명하지 못했다.
결국 팬티 정밀감정을 의뢰해 성폭행 용의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 정액이 검출됐지만 너무 오래돼 DNA 주인은 찾을 수 없었다. 사건 발생 5개월이 지난뒤였기 때문이다.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줄 실마리를 경찰 스스로 방치하다 때를 놓친 셈이다.
속옷 감정이 늦어지게 된 데는 정양 시신을 안치한 영안실 직원의 허위진술도 한몫했다.
당시 대구 K병원 직원 L씨는 경찰에서 "시신을 수습했을 때 팬티와 내의로 보이는 속옷과 피가 뒤엉켜져 있어 칼로 잘라내 버렸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런 진술을 들어 현장에서 발견된 속옷은 정양의 것이 아니라고 묵살했었다.
또 영안실 직원이 사체의 복장 상태를 조작한 흔적도 엿보인다.
정양의 아버지는 "속옷을 수습한 직후 영안실에 갔을때는 분명히 팬티도 브래지어도 없었다"면서 "다음날 다시 찾아가니 딸의 사체에 새것으로 보이는 브래지어가 입혀져 있었는데 영안실 직원이 한 짓 같다"고 말했다.
당시 L씨 언행의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재수사를 한 대구지검 관계자는 "담당 경찰관은 이미 작고한 상태고, 영안실 직원의 행방을 찾을 수 없어 이런 의문점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시신 부검 감정서도 묵살한 경찰.
시신 부검을 맡은 경북대 의과대학팀의 결론은 단순 교통 사망사고와는 거리가 멀었다.
부검팀은 감정성에서 "고속도로를 횡단한 점, 주거지와는 반대방향으로 이동하려 한 점, 술은 마셨지만 혈중 알코올 농도가 0.13%로 운동능력에 큰 지장은 받지 않을 정도"라고 밝혔다.
이어 "이런 점을 종합하면 이번 사고는 흔한 보행자 교통사고와는 다르며 사고 전 신변에 중대한 위협을 받아 매우 긴박한 상황에 처했음을 암시해 준다"고 덧붙였다.
이는 정양이 스리랑카 노동자 3명에게 집단성폭행을 당한 뒤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 한 정황과 상당히 일치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경찰은 부검팀이 제시한 의문점들중 어느 것 하나 밝히려 하지 않고 사건을 덮었다.
유족들은 이후 15년 가까이 청와대, 법무부 등에 수십차례에 걸쳐 진정서를 넣고 경찰을 고소하고 헌법소원까지 제기했지만 모두 각하 또는 무혐의 처분됐다.
정양의 아버지 정현조(67)씨는 "내 심정을 어떻게 다 말로 하겠습니까. 좋다고 할 수도 없고. 정말 착잡합니다"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