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던 송파구 거여동의 무허가건물 밀집촌인 개미마을이 아파트단지로 바뀐다. 거여동 개미마을 일대 9만8543㎡ 부지에 지상 33층, 17개동, 총 1932가구 규모의 아파트 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거여동 개미마을은 1960년대 도심 철거민의 집단이주지역으로 형성된 곳이다.
서울의 달동네로 잘 알려진 구룡·백사마을은 이미 재개발 허가를 받아 사업이 추진 중이다.
달동네는 왜 달동네일까?
달동네는 무허가주택과 오래된 불량주택이 모여 있는 도시저소득층 밀집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달동네의 시작은 전쟁 피난민들에게 산비탈에 무허가 건축 지역을 지정해 주면서 생겨났다. 1960년대 이후에는 급격한 이농으로 생긴 도시저소득층을 도시외곽의 구릉지대에 집단으로 이주시킴으로써 만들어져 하꼬방, 하꼬방촌, 산동네 등으로 불리다 달동네가 되었다.
달동네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첫째 달을 가까이 보면서 사는 높은 지대의 동네. 둘째 달세 즉 월세를 내는 방이 많아서 달동네. 달세는 월세의 부산 사투리다. 셋째 산의 옛 말인 '달'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대구 달구벌의 ‘달’이 산을 가리킨다.
달동네의 형성을 놓고 보자면 땅값이 싼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생긴 자연발생적 달동네가 있고, 도심 판자촌 사람들을 변두리 구릉지역에 내몰아 인위적으로 개발한 달동네도 있다. 산비탈 국유지에 철거민들을 강제로 이주 시켜 대규모 단지를 만든 곳이 경기도 광주다. 1969년 서울시가 빈민촌 거리를 철거하고 정비하느라 철거민 12만 명을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시켰다. 도로도 없고 버스도 안 다니고 상하수도 시설도 없는 황무지 구릉지역에 12만 명을 실어다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곧 공장 3백 개가 들어선다 지상낙원을 만들 거다라고 거짓 공약으로 속인 뒤 방치했다. 일거리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물마저 썩어 전염병이 나도는 등 견딜 수 없게 된 주민들은 결국 들고 일어났다. 10만 명의 주민이 시위에 나섰고 경찰차, 파출소가 불에 타며 도시가 점거되기도 했던 아픈 역사의 현장,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중원구가 바로 그 동네이다. 서울의 달동네들은 8~90년대의 집중적인 재개발 붐으로 대부분 사라졌고 부산, 인천 등 지역에는 이직도 달동네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가난한 이들의 허름한 동네로 여겨지던 달동네는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위치와 조망, 땅값으로 인해 부가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해 조망이 좋고 땅값이 도심보다 훨씬 싸니 고급 아파트단지로서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렵게 살아 온 마을주민들에게 그 부가가치가 제대로 돌아가진 않는다. 대개는 딱지가 주어지고 딱지를 팔고 그 지역을 떠나면 더 비참해 지는 경우가 많다.
오래 남아 있다 보니 가난 자체가 콘텐츠가 되어버린 마을들도 생겨나고 있다. 부산의 사하구 감천2동은 한국의 산토리니라 불리며 관람객들이 모여들고 영화 로케 장소로 많이 쓰인다. 부산의 대표적 서민 밀집 지역으로 꼽히던 아미동도 도시재생사업으로 새로운 마을로 재탄생한 곳이다. 옛날에 집단 묘지와 화장장 등이 들어섰던 곳인데 해방 후 6.25피난민과 이주민들이 공동묘지 위에 터를 잡아 비탈진 산에 마을이 형성됐다. 부산의 경관을 한 눈에 관람할 수 있는 위치여서 전망 좋은 명소로 변했다.
인천에서는 과거 동인천역 근처 과거 달동네였던 곳에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을 세웠다. 가을동화 촬영지로 유명한 강원도 속초 아바이마을도 있다. 충북 청주 수암골은 아예 달동네에서 카페촌으로 변했다. 6·25 전쟁 이후 피란민이 터를 잡으면서 생겨났는데 '카인과 아벨, '제빵왕 김탁구', '영광의 재인' 등 인기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되며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카페들이 들어섰다.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지대라는 이점도 작용했다.
인천시 강화도 온수리 벽화마을도 유명하다. 경남 통영 동피랑 마을은 대표적 달동네로 철거가 예정돼 있다 2007년 벽화 그리기 대회에 참가한 수십 명의 미술학도 덕분에 골목골목이 그림으로 채워졌고 지금은 한국의 몽마르트르라는 별명이 붙었다. 탄광지대로 유명한 강원도 철암의 삼방마을도 옛 탄광지대의 모습을 살리고 벽화도 그려 넣어 관광객을 끌고 있다.
달동네의 관광상품화는 글로벌 현상이기도 하다. 이른바 슬럼투어, 빈민관광이라 불린다. 브라질이나 남아프리카는 아예 마을 주민들이 관광해설사가 되어 마을 일주를 하며 설명도 하고 사진도 찍어준다. 마을 사람들과의 인터뷰도 가능하다. 물론 대부분 준비된 사람 준비된 장소이다. 마을 특산품도 사고 잠깐 시간을 내 토속춤도 배운다. 브라질, 남아프리카, 인도, 케냐 등등 세계 여러 지역에서 펼쳐지고 있는 틈새전략이다.
1980년대 남아프리카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흑인 빈민촌의 삶이 얼마나 참담한지 보여 줘 각성케 하려고 동네 순회관람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 빈민관광의 시작이라고 전해진다. 그런데 백인 관료들보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오히려 관심을 보이며 진짜 손님이 되어 버렸다.
우리의 달동네도 외국 다른 나라의 달동네도 관광객에게는 삶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고아원 양로원에 가 사진 찍고 선물도 안겨 주고 돌아들 간 뒤로 그 빈민촌의 삶이 달라진 건 없다는 것이다. 관광객은 추억을 얻고 마을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당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달동네가 무엇으로 개발되고 활용되느냐에만 주목해선 안 된다. 거기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으며 거기서 더 나은 삶을 개척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희망이 달보다도 먼 척박한 산비탈마을에 살던 사람들을 달마저 없는 사회의 어둠 속에서 떠돌게 해선 안 된다.